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충북 제천(堤川) 사람이다.
유인석(柳麟錫) 의진에서 활약하였으며, 이춘영(李春永)·정운경(鄭雲慶)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동하였다.
1894년 일제는 청일전쟁을 계기로 동학농민군을 탄압하면서 한국에 대한 침략을 노골화시켜 갔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개입으로 말미암아 국제정세가 변화하면서 친일 세력이 약화되자, 이에 불안을 느낀 일본제는 자국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급기야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어서 일제는 친일 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에 민중들과 유생들은 분연히 궐기하여 의병을 일으켜 대항하였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 유인석이 거의하자, 1896년 정월 초하루 정술원은 충북 제천(堤川) 지방에서 명망을 떨치고 있었던 정언조(鄭彦組)·이완하(李完夏)·이병선(李炳善) 등과 막하로 달려와 의진에 참여하였다. 그 지방 사정에 밝던 그는 곧바로 그 해 정월 5일 안홍원(安鴻遠)과 정탐을 나가 의병진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어 이춘영의 종사관이 되어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춘영이 순국하는 등 유인석 의진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1896년 4월에는 고종의 의병 해산조칙까지 내려져 대부분의 의병진이 해산하고 말았다. 이에 유인석 의진은 만주로 망명하여 후일을 기약하였다.
그 후 일제는 1904년 2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침략을 본격화하여 갔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을사륵약(乙巳勒約)」으로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1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치권을 장악하여 갔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본격적인 반일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즈음 만주에 망명해 있던 유인석 의병장은 이 시기를 국망의 위기로 인식하고, 그 전과는 다른 방도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보았다. 즉 유인석은 국권회복을 위한 거국적 의병봉기를 위한 전제로서 계(契)와 향약(鄕約)을 조직하는 한편 국내의 의병세력을 재결집하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인석의 이러한 거의론(擧義論)에 따라 1905년 6월 유의석(柳毅錫)과 이정규(李正奎)는 장의(掌議)가 되고, 정술원·이종(李鍾)은 각면의 약장(約長)이 되어 재기를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정술원은 정운경(鄭雲慶)이 그 해 9월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의 종사관으로 참여하였다. 정운경 의진은 단양·제천·영춘·청풍의 4개 군 일대에서 3∼4백 명의 장병들이 모여들었으며, 이 때 정운경은 의병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 전투를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정비되기 전에 원주진위대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다. 정운경이 군부로 압송되어 유배를 가자, 그는 다시 이강년 의진에 들어가 사한재서(司翰裁書)를 담당하면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호서의병사적(이구영편역, 1993) 352·360·383·480·482·508면
- 제천군지(제천군지편찬위원회, 1969) 31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27·30·67·2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