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평남 성천(成川) 사람이다.
채응언(蔡應彦) 의진에 가담하여 평남, 함남, 황해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식민지화를 향한 발걸음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분격하여 당시 전국적으로 수많은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거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주구배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통하여 무너져가는 국권을 회복코자 노력하였다. 박구진 역시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1909년 채응언 의진에 들어가 활약하였다.
채응언은 박구진과 같은 고향 출신으로 대한제국의 육군보병 부교(副校)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에 투신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무대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한 유명한 의병장이다.
박구진은 이같은 채응언 의진에서 종군하면서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1909년 여름 함남 안변군(安邊郡) 영풍면(永豊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음력 11월 평남 순천군(順川郡) 자산면(慈山面) 서창동리(西倉洞里)에서 순사 몇 명을 공격하였다. 이어 채응언의 명령으로 친일 주구로 활동하던 그곳의 이장 집을 방화 소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1910년 봄에는 같은 군 숭인면(崇仁面)에서 군자금을 징수하였으며, 같은 해 음력 9월 중 같은 군 구룡면(九龍面) 동창리(東倉里) 송감역(宋監役)에게, 또 같은 군 남전면(藍田面) 목구도에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그의 의병활동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11년 4월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택인리(擇仁里) 대현동(大峴洞)에서, 음력 8월 평남 성천군(成川郡) 대곡면(大谷面) 구련동에서, 음력 10월 숭인면 산막동(山幕洞)에서 군자금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1914년 9월 9일 평남 순천군 용선면(龍仙面) 숭인동(崇仁洞) 은산금광 부근에서도 군자금과 군수품을 수합하는 등 계속해서 군자금품 확보에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19년 12월 12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19. 12. 12 평양지방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