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31년 4월 이래 동지인 문석(文錫)·하순철(河順哲) 등과 교류하면서 이론적 소양을 쌓아가던 중 1932년 5월에 여수에서 노동자 등 무산대중(無産大衆)에 기초하여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7월 여수읍(麗水邑) 덕충리(德忠里) 장도(獐島)에서 문석·하순철·이창희(李昌熙) 등과 함께 ‘여수적색노동조합 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및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에 의거하여 직접 공장이나 직장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책임자는 하순철, 교통부는 문석, 정비노동부는 이창희, 고무공장노동부는 문석이 담당하고, 조병섭은 항만노동부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8월 하순경에는 조직의 부서를 개편하여, 조병섭이 조면공장노동부(繰綿工場勞動部)를 맡았다.
한편 ‘여수적색노동조합 건설준비위원회’가 결성된 것과 같은 1932년 7월 여수 의암산(義岩山)에서 정충조(鄭忠朝)를 책임으로 ‘여수적색노동조합 준비회’가 결성되었는데, 이와 조직적 연계를 갖고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혁명적 노동조합 준비 조직들은 모두 당시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과 관련되어 있었다. 조병섭은 12월 여수읍 동정(東町)에 있는 정호영(鄭鎬榮)의 집에서 정충조·김석훈(金石訓) 등과 회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준비로서 먼저 공장과 직장에서 독서회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을 교양하기로 하였다. 이에 정충조로부터 받은 「잉여가치란 무엇인가」 등을 교재로 혼다정미소(本田精米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10일경,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의 기관지 『적기(赤旗)』를 각지에 배포할 당시, 조병섭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에 체재하면서 이 지역의 배포를 담당하였다. 이때 이창희는 영암(靈岩), 김석훈은 나주(羅州), 김완근(金完根)은 광양(光陽) 등으로 이미 활동지역이 나뉘어져 있었다. 8월경 일본 경찰이 전라남도 지역이 중심인 위 조직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여 전국에서 8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조병섭은 체포를 면하고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에서 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과거 노동구제회(勞動救濟會) 오사카지부(大阪支部)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홍기환(洪基奐) 등과 함께 그 조직의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홍기환 등은 1936년 일제당국에 의해 합법단체인 오사카소비조합(大阪消費組合)이나 노동구제회 등이 모두 강제 해산을 당한 후 피크닉·해수욕·출옥동지 위안회 등 합법 활동으로 위장하여 단체의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38년 5월경부터 일본공산당(日本共産黨)의 재건운동 조직인 ‘일본공산주의자단’ 간부 미쓰야마 덴소(光山傳送)와 연계하여 동단(同團)으로의 발전적 합류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한 끝에, 같은 해 7월 16일 합류를 결정하였다. 이에 일본공산주의자단 내에 조선인부 조직을 분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로 하고, 동단에서 발행한 기관지 등을 받아 배포하면서 동지의 규합에 힘썼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9월 일본공산주의자단에 대한 일제당국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같은 달 13일 동지 홍기환·정암우(丁岩又)·송정효(宋正孝)·김영동(金榮東) 등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6. 2. 8)
- 사상휘보(思想彙報)(조선총독부검사국, 1936) 제8호 189~191, 194면
- 특고월보(特高月報)(내무성경보국보안과, 1938. 12) 134~135, 177면
- 소화특고탄압사(昭和特高彈壓史)(명석박륭(明石博隆)·송포총삼(松浦總三), 1975) 6권 237~238면
- 재일조선인관계자료집성(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 4(1)권 177~178면
- 여수항일운동사(麗水抗日運動史)(여수항일운동사편찬위원회, 2006) 190, 505~507, 5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