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영명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만세시위 준비를 후원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외국 신문에 기고하였고, 1936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가 강제 출국당하였다.
1912년 6월 조지아공과대학 졸업후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한 윌리엄 린튼은 1919년 당시 전북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理) 소재 영명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5일 영명학교에서 태극기 및 독립선언서를 제작했음을 알아차린 일제 경찰들이 교장 린튼의 집과 학교 교사,교회, 그리고 교원들의 집을 수색하였다. 이때 교회에서 서울에서 배포한 독립선언서 등사본 2,000여 매가 발견되었다. 이에 따라 일제측은 교장 린튼을 비롯한 교사 불루,하리슨 등 외국인 교사들이 3월 5일 발생한 군산의 만세운동을 선동하였다고 의심하였다.
1919년 기독교 평신도회의에 참가한 린튼은 그 해 5월 '한국인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가'라는 글을 영자신문지에 기고하여 한국인들의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생생히 전하면서 한국 독립을 설파하기도 하였다.
이후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린튼은 1936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신흥학교는 폐교 조치당하였고, 린튼은 일제의 선교사 강제추방령에 의해 출국당하였다.
린튼은 해방 이후 다시 내한하여 전북지역에서 선교활동과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학교 정상화에 노력하였으며, 1956년에는 대전대학(숭전대학 대전캠퍼스)을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냈다. 병으로 미국으로 귀환한 후 1960년 10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6권 915면
- 조선일보(1936. 12. 9)
- 治安狀況(1937年) 第26報 ∼ 第43報(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