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1932년 10월 23일 함흥과 흥남을 중심으로 태평양노동조합 재건 (太平洋勞動組合再建) 에 관한 운동정세를 탐사하다가 1933년 1월 함흥부 복부정 (福富町) 고경인 (高敬仁) 의 방에서 김원묵 (金元黙) 등이 발간하던 노동자 신문 (勞動者新聞) 을 계속 발간할 것을 최장섭 (崔長燮) 등과 협의하고, 1월 말 운동상황과 운동자금조달을 협의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 연락부에 가서 금 3백원을 찾아가지고 3월 29일 함흥에 귀착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년을 받고 이감 (移監) 중 만세 (萬歲) 를 불렀다는 이유로 징역 10개월이 가형 (加刑) 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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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임민호는 함북 회령군 창두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 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 용정(龍井)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용정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 동흥중학(東興中學)에 입학하였다.
1926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1932년 10월 23일 함남(咸南) 함흥과 흥남을 중심으로 태평양노동조합(太平洋勞動組合) 재건(再建)을 추진하였다. 1933년 1월 함흥 고경인(高敬仁)의 거처에서 노동자신문(勞動者新聞)을 계속 발간할 것을 협의하였고, 동년(同年) 1월 말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태평양노동조합 블라디보스톡 연락부에 가서 금 3백 원을 찾아가지고 3월 29일 함흥에 돌아왔다.
이로 인해 체포된 임민호는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았다. 또한 이감(移監) 중 만세를 불러 징역 10개월이 가형(加刑)되었다. 일제 패망 이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회의 주석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395, 396면
- 共産大學卒業者의 軍事스파이사건 檢擧에 관한 건(1937. 1. 22) 일본의 한국침략사료총서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朝鮮中央日報(1933. 11. 22, 1934. 7. 1·12. 9, 1935. 1. 23·3. 12, 1936. 3. 26)
- 東亞日報(1934. 12. 9·12. 10, 1935. 3. 4·3. 5·3. 12·3. 19, 1936. 1. 26·2. 8)
- 思想彙報(고등법원검사국사상부) 제1호(1934. 11. 30), 제2호(1935. 2. 28) 제3호(1935. 5. 31)
- 間島 및 琿春地方 朝鮮人의 結社團體調査報告(1926. 6. 1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