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권태종은 강원도 강릉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에 동참할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이 시기 1930년대 강릉지역 대중적 농민조합운동은 강익선(姜益善)과 권인갑(權麟甲)이 주도하였다. 권인갑은 1930년 4월 중국 북경에 가서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6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공작의 사명을 띠고 귀국하였다. 또한 강원도 강릉에서는 1931년 11월 10일 강익선의 집에서 최선규(崔善珪)·최돈근(崔敦根)·정용화(鄭用和)·조국환(曺國煥)·김동하(金東夏) 등이 회합하여 강릉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통칭 y:책임자 강익선)를 조직하고 강령과 규약 및 슬로건을 제정하였다. 중국에서 귀국한 권인갑은 강익선과 협의하여 1932년 3월 19일 강릉적색농민조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강릉적색농조는 강익선·권인갑·정인화·최덕근·최승팔 등을 위원으로 선정하고, 군농회와 산림조합을 반대하는 동시에 소작료를 5할로 할 것 등 15개 항목을 결정하였다. 강익선과 권인갑은 강릉적색농민조합을 매개로 강릉 지역에서 야학 활동을 전개하는 등 혁명적 농민조합 건설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강릉적색농민조합을 중심으로 1932년 4월 10일 조선공산당재건 강릉공작위원회(통칭 p)를 조직하였다. 강릉공작위원회의 최고중앙집행위원회 총책임자는 강익선, 정치국 책임은 권인갑이 맡았다. 그러나 총책임자 강익선이 1932년 노동야학 연극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에 권인갑이 강릉공작위원회 총책임을 맡게 되었으며, 강익선의 후임으로 그의 동생인 강덕선(姜德善)이 강릉공산청년동맹의 책임을 맡았다. 강릉공작위원회는 1933년 2월 가마니 판매문제로 농민 300여명을 가마니검사소에 집합시켜 군청으로 몰려가 시위를 일으키는 등 활발한 대중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강릉공작위원회에서도 1933년 10월 중순 조직이 일제에 의해 드러날 때까지 200여회의 회합을 가지는 등 비밀결사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의 많은 회합을 가졌다. 1932년 4월 강릉공작위원회를 결성하고 이를 지도기관으로 하여 부문별로 공산청년동맹, 적색노조, 반제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권태종은 중국 북경에서 온 권인갑의 권유로 강릉공작위원회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1933년 6월 중순 강원도 강릉군 성남면 남산부근에서 강덕선의 권유로 강릉공산청년동맹준비위원회에 가입하였다. 그는 강릉공산청년동맹을 중심으로 운동에 전개하던 중인 1933년 9월 종로방직 파업사건 관련자 특별경계 때 조직이 탄로나면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일제에 검거된 권태종은 1935년 7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共産主義運動史(이기하, 1976) 1250, 1260면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別集 1권 298면
- 思想彙報(朝鮮總督府, 1936) 제4호 21-32면
- 朝鮮中央日報(1935. 8. 24. 호외)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