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9권(2011년 발간)
김교신은 함흥농업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2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고, 지리, 박물과로 전과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일본 유학 당시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기독교의 자주성을 주장하면서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하던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유학생이던 함석헌(咸錫憲),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양인성(梁仁性),유석동(柳錫東) 등과 함께 동경에서 조선성서연구회(朝鮮聖書硏究會)를 조직하여 우리말 성경을 읽고 연구하였다.
1927년 7월 송두용,정상훈,양인성,유석동 등과 협의하여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일본 동경에서 창간하였으며, 1930년 5월 제16호부터 혼자서 주필 겸 발행인으로 ≪성서조선≫을 발행하였다. 한편 김교신은 1927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와 양정중학교, 경기중학교, 그리고 개성 송도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등 주로 민족사학(民族私學)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무교회주의를 실천한 종교인이자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다.
김교신이 주필 겸 발행인으로 간행하던 ≪성서조선≫은 1934년부터 폐간되던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로부터 출판물 압수와 출판금지 처분을 10여 차례 받았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의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 강화된 출판법 적용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의 출판금지 처분을 받은 ≪성서조선≫은 1942년 3월호의 권두언인 '조와(弔蛙)'에서 조선민족의 소생을 노래했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폐간을 당하였다.
김교신은 1942년 3월 30일 소위 성서조선사건과 관련하여 함석헌, 정상훈, 송두용 등 12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검거되었고, 1년 동안 미결수 상태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43년 3월 29일 석방되었다. 이후 1944년 7월 일본질소비료공장 흥남연료용흥공장[흥남질소비료공장]에 취업하여 조선인 노무자 주택인 서본궁(西本宮) 관리계 계장으로 일하던 중이던 1945년 4월 병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金敎臣(한국신학연구소, 1994년) 171~173면
- 嘉信(矢內原忠雄, 1945. 9) 제8권 제9호 65면
- 聖書朝鮮(1942. 3) 第158號 50면
- 朝鮮出版警察月報(國史編纂委員會) 제64~75호, 제76~99호, 제114~123호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