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1930년대 초 신사상에 입각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장평완은 1925년 여수보통학교(麗水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대판(大阪)으로 건너가 일을 하다 1927년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29년 8월 경 신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929년 같은 여수보통학교 출신인 김용환(金龍煥), 여운종(呂運鍾)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한 후, 빈곤하게 살 수밖에 없는 무산자의 현실을 비판하며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독립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인식했다. 1930년 8월 봉산리(鳳山里) 의암산(義岩山)에서 여수사회과학연구회(麗水社會科學硏究會)를 조직하고 1931년 1월 여수청년전위동맹(麗水靑年前衛同盟)을 결성하여 책임자 겸 회계로 활동하였다. 1932년 7월 장평완은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麗水赤色勞動組合準備會)를 조직했다.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는 각 공장 분회를 기초로 산업별 조합을 구성하기 위해 항만·정미업·교통 등의 산업별로 조직을 정비해갔다. 이때 장평완은 철공노동부(鐵工勞動部)의 책임자가 되어 노동자의 의식 함양과 권리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2월 장평완은 여수청년회관에 ‘좌익도서부’를 설치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일제는 장평완에게 소위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을 적용코자 투옥시켰지만 재판은 지지부진했다. 결국 검거 4년만인 1936년 5월에 제1회 공판을 갖고, 징역 2년을 선고받았지만, 미결구류기간이 2년이 넘어 곧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34. 1. 31, 1936. 5. 5, 6. 12, 7. 1)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사상휘보(조선총독부:1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