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경북 청도 출신으로 1907년 4월부터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격문을 발표하였고, 1907년 7월에는 부하 70명을 거느린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을 모색하던 중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전하였다. 1906년 4월 산남의진의 대장 정용기(鄭鏞基)가 신광면 우각동(牛角洞)에서 경주진위대에 체포당한 뒤 자수하였으나 일본군의 악형으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최한룡은 1907년 4월부터 1908년 1월 사이에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국권회복을 부르짖는 다섯 차례의 격문(檄文)을 발표하였다. 즉 <天下에 告示하는 文>(1907. 4), <國債償還件>(1907. 5), <斷髮令件>(1907. 7), <埃及近代史를 읽고 大韓國의 危急함을 歎함>(1908. 1), <國體로서 賊國을 討伐할 件>(1908. 1) 등을 통해서 국민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리고 1907년 7월경 부하 70여 명으로 창의, 의병장으로 청도·영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최한룡은 190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으며, 1909년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해인사(海印寺)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최한룡은 합천 해인사와 경남 밀양(密陽)에 거주하는 사위 박재하(朴在夏)의 집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요양을 하다가 1917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한말의병전쟁자료집(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민족문화연구소) 257~288면
- 金賢鎭·崔翰龍의 陳述書 抄本 報告 件(警秘發 제804호, 1908. 6. 11) 統監府文書(國史編纂委員會) 제2권 162~188면
- 韓國獨立運動史資料16 義兵篇ⅸ(國史編纂委員會) 441~44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