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보통학교 졸업 후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29년 구례청년동맹(求禮靑年同盟) 집행위원장을 맡아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2월 하순경 동아일보 구례지국 내에서 선동기(宣東基)·서학종(徐學鍾) 등과 함께 구례농촌지도부(求禮農村指導部)를 조직한 뒤 적색농민조합으로 발전시키고자 힘을 쏟았다. 이들은 당면과제로서, 동군 마산면(馬山面) 청천리(淸川里) 농민으로 조직된 저축계(貯蓄契)를 적농민조합(赤農民組合)으로 개조할 것, 동군(同郡) 광의면(光義面) 연파리(煙波里) 혁농회(革農會)를 지도해 적색농민조합으로 개편할 것 등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들 농민적 기반을 구례적색농민조합(求禮赤色農民組合)으로 힘을 모아가는데 노력하였다.
이들은 1933년 2월 27일 이상암의 집에서 선동기가 집필한 ‘3·1기념일을 잊지 말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 문서를 60부 가량 등사하여 배부하는 등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현직보통학교 교원, 면서기, 기농회기수, 학생, 신문기자 등 각층을 망라하여 조직된 전북교원적화사건(全北敎員赤化事件)의 일부 사건으로 7월 임실경찰서의 검거를 시작으로 전남북, 경남등 3도 13군에서 40여 명을 검거한 대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33년 8월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으로 체포되어 1935년 10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받고 약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全州地方法院, 1935. 10. 25)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朝鮮中央日報(1933. 8. 17, 1934. 12.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