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07년 대구(大邱)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1907년 4월부터 6월까지 15회에 걸쳐 성주의무소(星州義務所)에 나뭇짐을 해서 마련한 30냥을 국채보상금으로 출연하였다.
그는 평소 절개가 굳어 무조건 일본사람에게는 복종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금을 바쳐라’ 해도 안 바쳤고 ‘퇴비증산을 하라’ 하면 거름을 모으다가도 중단했으며, ‘신작로’는 일본인들이 만든 것이라 하여 일부러 논두렁 밭두렁으로 빙빙 돌아다녔다고 한다. 때문에 순사들의 호출을 받아 경찰서 문을 제집 드나들 듯 하다가 만주로 떠났다.
1919년 4월 만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전재산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찾아가 5백원을 기부하였다. 이때 그가 독립운동에 바친 돈은 그의 전재산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國債報償錢領收證(1907. 3. 17·4. 2·4. 22·4. 27·5. 2·6. 17)
- 第75號領收證(1919. 4. 3)
- 韓溪遺稿(國史編纂委員會, 1981) 제8책
- 大邱日報(1967. 8. 16)
- 皇城新聞(1907. 4. 11)
- 嶺南日報(1968. 3.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