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1931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 김두봉(金枓奉) 집에서 한인유학생회장 유진동(劉振東)의 권유로 한국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한인유학생회(韓人留學生會)에 가입했으며,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국내 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 귀국한 그는 1935년 7월 대구에서 문상직(文相直)의 소개로 유용목(兪龍穆)의 친족인 유봉견(兪鳳見) 등을 포섭하여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에 입학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상하이에서 일본군 정보 수집에도 힘을 기울였다. 상하이조선인민회장(上海朝鮮人民會長) 이갑녕(李甲寧)과 언론 정보 등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상하이 주둔 해군육전대는 약 3천명, 의용대는 약 3천명, 재향군인은 약 1천명이고 일본 육군은 아직 상해에 도달하지 못하였음'을 탐지하여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중국군 상교(上校) 곽기원(郭琦元)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곽기원이 조선으로 돌아가 '일본의 대중국작전계획 및 군대수송의 상황' 등을 상세히 조사해 줄 것을 부탁하자, 일본의 군사상 기밀에 속하는 사항을 탐지·수집할 목적으로 동년 8월 25일 상해에서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해 부산(釜山)으로 귀국했다.
대구(大邱)에서 일본군의 상황을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김종구는 1938년 6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외환(外患)에 관한 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의 받고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38. 6. 3)
- 判決文(大邱覆審法院, 1938. 7. 1)
- 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