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30년 9월 20일경 북제주군 구좌면(舊左面) 세화리(細花里)에 있는 김시화(金時和)의 집에서 청년 10여 명과 함께 간담회(懇談會)를 열고, 논의 끝에 비밀결사 ‘민중운동자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당시 제주에는 일본 관리들이 해녀들을 가혹하게 대우하고, 일제의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海女漁業組合)이 뇌물을 제공한 일본인 상인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해산물을 매입할 수 있도록 특혜를 주는 등의 부정으로 인해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海女會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섰다. 이는 결국 1,000여 명의 해녀들이 참여한 시위투쟁으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김여찬은 해녀들의 뱃사공으로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2월 20일 김여찬을 비롯해 부춘화(夫春花)·부덕량(夫德良)·김옥련(金玉連) 등의 해녀들이 모여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 그 결과 1932년 1월 7일 구좌면 세화장터에서 1차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1월 12일에는 당시 제주도사(濟州島司)이자 해녀어업조합장이었던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면사무소를 방문할 때 호미와 전복 채취도구인 빗창을 들고 총궐기하여, 해녀어업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대규모의 항일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들은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다구치와 담판을 벌여 지정판매 반대와 공정한 입찰, 조합비 조정, 조합재정공개, 손해배상 등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이 과정에서 1월 24일 해녀들이 세화주재소(細花駐在所)로 몰려가 투쟁하다가 29명이 검거되었다. 이러한 해녀투쟁의 배후에 민중운동자협의회라는 비밀결사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전라남도경찰부의 지원을 얻어 26일 11명의 남성을 검거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김여찬도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들의 체포를 막기 위해 800여 명의 해녀들이 우도(牛島)에서 온몸으로 맞섰고 일본 경찰은 공포탄까지 10여 발을 쏘면서 이를 저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또 다시 다수의 해녀들이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민중운동자협의회에 관련된 27명은 같은 해 5월 14일 목포(木浦)로 압송되어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김여찬도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었다가, 같은 해 6월 15일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12. 11, 1932. 1. 28, 3. 4)
- 동아일보(東亞日報)(1932. 5. 22)
- 제주항일독립운동사(濟州抗日獨立運動史)(1996) 285~302면
- 여성운동(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48면
- 독립유공자공훈록(부덕량, 부춘화, 김옥련 항목)
- 형사피의자색인부(刑事被疑者索引簿)(1932) 제2-1호 및 제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