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5권(2003년 발간)
경남 사천(泗川) 사람이다.
1933년 고향의 삼천포공립보통학교(三千浦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후 부산중학교(釜山中學校)에 재학 중 부산중학조선인회(釜山中學朝鮮人會; P.M.K.C- Pusan Middle School Korea Combination)에 가입하여 민족사상을 배양하였다. 1938년 3월 부산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년 4월 중앙대학(中央大學) 제1예과 제2학년에 편입·재학하면서 1939년 7월 하순 경 조선이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는 길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여 고담룡(高湛龍)·김운봉(金雲鳳) 등과 함께 무명의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1940년 6월 하순경 고담룡·김운봉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운동의 방법으로 한민족의 단결심 양성, 자력 함양, 미국을 통한 독립운동 도모 등을 전개하기 위해 고문(高文)그룹을 조직하였다. 고문그룹은 표면적으로 학술연구와 상호 친목단체로 위장하여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동지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법으로 결사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의 방법으로 간디의 비폭력(非暴力) 무저항주의(無抵抗主義)를 기본적으로 채택하되, 독립을 위한 투쟁을 협의하였다. 또한 1940년 10월 말경 구호림 등은 일본정책에 편승하여 실력을 양성하며 자력(自力) 본위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매진할 것과 독립 후 통치체제는 히틀러의 나치주의를 모본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후 1940년 11월 이들은 모임을 갖고 기념촬영을 하면서 졸업후 관계(官界) 혹은 재계(財界)로 진출하여 평생 독립을 목표로 헌신할 것을 협의하는 등 1940년 6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약 11회에 걸쳐 독립쟁취 방법을 논의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1944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2년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大邱刑務所名籍表
- 豫審終結決定書(大邱地方法院 豫審係, 1944. 2. 29)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1944.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