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5년 10월 8일 지호동우구락부회관(志湖同友俱樂部會館)에서 안동의 유지 청년들과 함께 사상단체 정광단(正光團)을 창립하고 조사부(調査部)를 맡아 활동하였다. 13일 안동청년회관(安東靑年會館)에서 안동지역 최초의 노동단체인 노우회(勞友會)가 창립될 때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1월 ‘도산서원(陶山書院) 철폐운동 연합위원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6~8일 김천청년동맹회관(金泉靑年同盟會館)에서 경북청년운동자간담회(慶北靑年運動者懇談會)가 개최되고, 마지막 날인 8일에는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 창립대회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때 경북청년연맹의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7년 8월 신간회 안동지회(安東支會)에 참여했으며, 1928년부터 신간회 안동지회 간사·대표위원·정기대회 전형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가을경 신간회 안동지회 회관에서 안상길(安相吉)의 권유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였다. 김경한(金慶漢)을 책임으로 한 안동야체이까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6월 11일 조선공산당 안동군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2일 손문로(孫文老)의 집에서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당원의 교양과 야체이까 조직·선전·재정·비밀유지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후 대구로 이주하여, 1929년 8월 신간회 대구지회의 서기(書記) 겸 서무부장(庶務部長)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9년 12월 15일 류쾌동(柳快東)·정간(鄭澗)·박명줄(朴明茁) 등 3인과 함께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에 검속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런데 얼마 후인 1930년 1월 7일 저녁 대구사회운동자 신년간친회(新年懇親會)를 마치고 8일에 또 다시 송두환(宋斗煥)·장인환(張仁煥) 등과 함께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후 채충식(蔡忠植) 등 다수가 체포되었고, 사건은 서울로 이어져 종로경찰서(鍾路警察署) 고등계(高等係)를 중심으로 한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3월 17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나, 얼마 후 불기소(不起訴) 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이후 이걸소(李傑笑)·이회승(李會昇)과 함께 또 다시 대구경찰서에 검거되었다. 이 사건은 ‘ML당 안동야체이까 사건’이 되었고, ‘경북공산당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2월 27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았다. 1931년 10월 27일 형 집행 만기로 대구형무소(大邱刑務所)에서 출옥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포항지국장(浦項支局長)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30. 12. 27)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재소자신분카드(대구형무소)
- 동아일보(東亞日報)(1925. 10. 13, 11. 27, 1929. 8. 28, 1930. 1. 12, 3. 18, 3. 29, 11. 11, 12. 19, 1931. 12. 6)
- 중외일보(中外日報)(1928. 1. 15, 1930. 1. 5, 1. 10, 1. 11, 1. 13, 2. 26, 3. 13, 8. 3)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3. 14, 3. 18)
- 시대일보(時代日報)(1925. 11. 25~26)
- 매일신보(每日申報)(1930. 3. 29)
- 사상(思想)에 관한 정보철(情報綴)(2)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29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