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경상남도 창원군의 웅천공립보통학교(熊川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창원청년동맹(昌原靑年同盟) 웅천지회(熊川支會)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 8월 박정환(朴正煥)·김민배(金民培) 등과 함께 일제의 강제병합일인 8월 29일을 기하여 망국민(亡國民)임을 자각시키고 조선독립의 기운을 촉진할 목적으로 ‘불온’ 격문을 제작해 배포하기로 하였다. 같은 달 28일 오전 10시경 창원군 웅천면(雄川面) 남문리(南門里)의 박상록(朴尙綠) 집에 모여, “오늘은 8월 29일 망국기념일, 아아, 불행한 사회 약소민족이여, 각성하라”라고 쓰고 적기(赤旗)를 그린 문서를 작성하였다. 그리고 박정환이 소유한 석판(石版)과 복사지로 ‘금일은 8월 29일 망국기념일, 생각하라, 일본제국주의 파멸, 조선혁명 성공 만세, 우리의 무기는 단결’ 등을 기재한 ‘불온’ 삐라 약 100매를 복사하였다.
다음날인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 당일 오후 3시경에 이 문서를 다중의 눈에 잘 띄는 남문리 김봉순(金鳳順)의 집 등 7개소에 부착하고, 또 삐라는 다수가 왕래하는 여러 요로(要路)에서 배포하였다. 이들의 ‘1차 격문 사건’에 이어서, 웅천면 내에서는 9월 2일과 22일에 두 차례 더 격문 사건이 일어났다. 조맹규(曺孟奎) 등의 청년들이 성내리(城內里)와 용원리(龍院里)에서 “국치일을 기념하고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조선 약소민족은 궐기하여 크게 투쟁하자” 등을 기재한 격문을 살포하였다.
서도인 등이 격문을 배포한 당일부터 9월 초 사이에 일제 경찰은 이들을 비롯해 창원청년동맹과 웅천농민조합(熊川農民組合) 간부 김희배(金熙培)·김창업(金昌業)·강영호(姜榮浩) 등 다수의 청년들을 검거하였다. 먼저 ‘웅천 1차 격문사건’ 관계로 김민배, 박정환과 함께 검찰에 기소되었다. 1930년 10월 14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마산지청(馬山支廳)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개성소년형무소(開城少年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1년 9월 19일 가출옥(假出獄)으로 석방되었다. 1938년에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진해지국(鎭海支局)의 웅천주재 기자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8. 31, 9. 1)
-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경상남도경찰부, 1936. 12월) 7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