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박노백은 전남 광주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25년 10월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였다. 일본 유학중 1927년 3월 15일 재동경동부노동조합(在東京東部勞動組合) 조사부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코트홀에서 신간회 동경지회 설립대회에 참석하여 간사로 선출되었다. 그후 신간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총무간사, 학생부 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유학생으로서 1927년 12월 18일 재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정기회에 참석하여 위원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방학 중에는 중국 간도(間島) 혼춘(琿春) 등지로 순회강연회를 가기도 하였다.
이후 박노백은 신간회 및 학우회에서 활동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독립하려면 우선 노동자들이 단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박낙종(朴洛鍾)·안광천(安光泉)·한림(韓林) 등과 교류하였고, 1927년 10월 하순경 신간회 동경지회 사무소에서 김상혁(金相赫)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고 심천(深川)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그후 박노백은 심천야체이카 구성원인 김황파(金荒波)·임종웅(林鍾雄)·이우진(李愚震) 등과 수회에 걸쳐 회합하고, 1928년 5월 인정식(印貞植)이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책임비서가 되자 조선유학생학우회내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1928년 8월 29일 박노백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 병탄당한 날을 앞두고 대대적인 반일시위를 벌이고자 하였다. 박노백 등 고려공산청년회 회원들은 표면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在日本朝鮮勞動總同盟), 신간회 동경지회, 조선유학생학우회 회원들을 지도하여 시위운동에 참여시키기로 하였다. 그래서 경술국치일인 8월 29일 오후 9시경 동경시 사곡구(四谷區) 신숙(新宿) 소재 무장옥(武藏屋)백화점 옆에서 한국인 약 150명이 모여 도로로 나아가 혁명가를 고창하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그 배후에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가 있다고 지목하고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였다. 박노백은 1928년 11월 초순 체포되었고, 1931년 3월 31일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년형을 받았다. 그후 그해 4월 8일 항소를 제기하여 풀려났다가 같이 보석 중이던 박득룡(朴得龍)·박득현(朴得鉉) 등과 탈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朝鮮日報(1930. 1. 26, 11. 25, 1931. 1. 14, 4. 11, 1932. 1. 28, 2. 15, 5. 22)
- 東亞日報(1927. 3. 27·12. 31)
- 高等警察要史(慶尙北道警察部) 156, 161면
- 現代史資料(姜德相) 第29卷 165면
- 豫審終結決定書(東京地方裁判所:1930. 6. 30)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13집 1714면, 제14집 294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18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