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06년 경북 영천에서 정용기(鄭鏞基) 의병장이 거의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자 입진하여 초장(哨將)·도포장(都砲將) 등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에 기의한 산남의진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체포되었던 정용기가 풀려나온 뒤였다. 진용을 재정비한 정용기의병부대는 1907년 4월에 400여 명의 규모로 청송(靑松)과 청하(淸河), 영천 일대의 일본군을 습격하면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조상환은 정용기 의병부대의 초장과 도포장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보현산(普賢山) 일대의 포수를 비롯하여 뜻있는 사람들을 의진에 참가시키는 한편 군수물자를 수집하는데 앞장섰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 정용기의병장이 일본군과 교전 끝에 순국하자,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아들의 의병부대를 수습하여 재차 기의하였고 조상환도 이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은 재개하였다.
같은 해 10월과 11월에 이들 부대는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을 벌여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2월 7일 영덕전투에서는 일본군 20여 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청하 지역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정환직 의병장이 체포되자, 조상환은 이세기(李世紀) 등과 함께 군사를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이끌면서 청송(靑松)·안동(安東)·의성(義城)·군위(軍威) 등을 무대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던 중 청송 지역에서 붙잡혔다.
이때 일본군은 조상환에게 전향할 것을 권유하고 조상환을 앞세워 여러 고을의 의병들을 회유하고자 했으나 조상환은 이를 끝내 거부하였다.
오히려 그는 1908년 2월 23일 감시하는 일본군을 죽이고 탈출하다가 일본군의 총격을 받아 효령(孝令) 장터 뒷산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山南倡義誌 下卷 41·42面
- 山南義陣遺事(山南義陣遺事刊行委員會, 1970) 430∼434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