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음 (陰) 12월 경북 (慶北) 안동군 (安東郡) 임북면 (臨北面) 에서 차경석 (車京錫) 을 교주 (敎主) 로 하는 흠치교 (吽哆敎) 에 가입, 국권회복 운동 (國權回復運動) 을 할 것을 결의하고 1924년 갑자 (甲子) 해에 동교 (同敎) 의 힘에 의해 독립이 될 것이라는 선전활동과 신자 (信者) 로서 자금 출자 및 교도 (敎徒) 모집에 힘써 교 (敎) 의 확장을 도모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징역 1년을 받았으며, 1927년 경북 (慶北) 안동에서 신간회 (新幹會) 안동지회 (安東支會) 집행위원 (執行委員) 으로 활동한 사실 (事實) 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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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강일순(姜一淳) 사후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 흠치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흠치교에서는 교단 조직을 이용하여 치성비(致誠費)라 불리는 군자금을 모금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확신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1919년 음력 12월 닭의 생피와 산수(山水)를 마시며 ‘옥황상제 하감(下鑑)의 전(前)’이라고 종이에 써서 이를 제사지내고 일심동체임을 서약한 후 국권회복운동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 후 겉으로는 흠치교의 포교와 선전을 표방하면서 교도들을 모집하고, “1924년 갑자(甲子)의 해는 교주 차경석이 계룡산에 도읍하고 제위(帝位)에 취임하여 일본통치에서 벗어나 한반도를 통일하여 조선이 독립할 해이다. 이로써 교도는 국민이 되고 관직을 얻는다”는 취지의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4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간회 활동에도 참여하여 1929년 신간회 안동지회 대표회원, 기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뒤 1934년경에는 고향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고, 1940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大邱地方法院 安東支廳, 1921. 4. 22)
- 朝鮮日報(1929. 1. 29·8. 14)
- 東山柳寅植先生文集(1978) 7·1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