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을사늑약 (乙巳勒約) 이 체결되자 전덕기 (全德基) , 이준 (李儁) , 김구 (金龜) (구 (九) ) 등과 함께 상동교회 (尙洞敎會) 에 모여 이의 부당성 (不當性) 을 지적한 상소문 (上疏文) 을 올리기로 결의하고 최재학 (崔在學) 을 소수 (疏首) 로 하여 대한문 (大漢門) 앞에서 상소 활동 (上疏活動) 을 전개하였고, 1906년 평남 (平南) 순천군 (順川郡) 신창면 (新倉面) 에 사립 일신학교 (日新學校) 를 설립하였으며 1907년 신민회 (新民會) 가 결성되자 회원 (會員) 으로 참여하였고, 1919. 3월 평남 (平南) 순천군 (順川郡) 신창면 (新倉面) 에서 이윤영 (李允榮) 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한 후 피신하면서 만주 (滿洲) 통화현 (通化縣) 소재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에 군자금을 지원하는 등 활동 (活動) 하다가 피체 (被逮) 되어 3.1운동 관련으로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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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문(大韓門) 앞에서 상소를 올려 이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한편, 1919년 3월 5일 신창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의 청년회 회원 30여 명이 결사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서울 남내문 내 상동(尙洞) 감리교 예배실로 모여들었다. 이때 유두환도 김희간(金喜侃)·김병현(金秉鉉)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그들은 5명씩 한조를 이루어 대한문 앞에서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그후 그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신창(新倉)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7년 경에는 서울 냉천동(冷泉洞)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 고향에 돌아와 운산(雲山) 교회의 목사로 재직하고 있던 중, 1919년 3월 5일 이윤영(李允榮)·유경운(劉景雲) 등과 함께 신창면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그는 일경의 검속을 피하여 서울로 와 만주 통화현(通化縣)의 무관학교와 연계하며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20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표창장(인천시장, 1967. 3. 1)
- 劉斗煥의 一平生 歷史(自敍傳, 毛筆草本, 作成年代 未詳)
- 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愼鏞廈, 1985) 18·46面
- 白凡逸志(毛筆草本, 原本) 117·118·119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