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8권(2023년 발간)
함경북도(咸鏡北道) 명천군(明川郡) 서면(西面) 출신으로 중국 북간도(北間島) 연길현(延吉縣) 수신향(守信鄕) 소오도구(小五道溝)로 이주했다. 1929년 8월경 노창률의 권유로 고려공산청년회와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소오도구 제2야체이카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병직은 제2야체이카 책임자였고 김광호(金光瑚)와 장극준(張極俊)이 소속되어 있었다. 1930년 3월 10일 동만도 책임간부가 연길현 수신향 내풍동(內豊洞)에 와서 내풍동 야체이카를 평강군 간부로 재편하였다. 그 결과 이병직은 장극준이 책임자인 소오두구 야체이카에 소속되었다. 1930년 3.1운동준비위원회 회원 오창일에게 운동 준비금으로 8원 10전을 전달했다. 1930년 2월 28일 3.1운동기념 시위를 위한 준비위원으로서 연길현 두도구(頭道溝)에 가서 농민 300명을 모아 시가지로 진입하였다. 3월 1일에는 개척촌으로 가서 800명의 농민을 집합시켜 기념식을 거행했다.
1930년 만주지역의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노선이 급진적인 대중투쟁 노선으로 전환되면서 이른바 ‘5‧30간도봉기’가 일어났다. 1930년 6월부터 다수의 간도지역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이때 이병직도 간도총영사관 경찰서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1931년 12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1932년 7월 8일 대전형무소로 이감하게 되어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 최익한(崔益翰)이 대전역 제1플렛폼 등에서 “조선공산당만세‧조선민족해방만세‧조선민족독립만세”라고 외쳤다. 이병직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가 1933년 1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 1933. 1. 25)
- 매일신보(每日申報)(1930. 6. 22, 8. 2)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6. 27)
- 동아일보(東亞日報)(1931. 12. 6)
- 중앙일보(中央日報)(1931. 12. 27)
- 경성지방법원 형사사건기록(국사편찬위원회 소장자료) 제989권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