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
이밖에 1943년 3월 한국독립당 중경시 제3구 비서, 1944년 3월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맹원, 1945년 3월 신한민주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청년 시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에 거주하며 여명중학교(黎明中學校)를 졸업하였다. 1925년 11월 북경사회과학연구회(北京社會科學硏究會)의 간부와 1927년 5월 북경조선인청년회(北京朝鮮人靑年會)의 창립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산시성(山西省)의 산서군관학교(山西軍官學校)를 수료한 후 중국군 중교(中校, 현재의 중령)로 10여 년간 근무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위한 군대 창설을 계획하고 선전, 군인 초모활동과 군사거점 마련을 목적으로 1939년 11월 중국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중국군에 근무하던 이석화는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군사특파단에 합류하였다. 중국군의 신용을 얻고 있던 이석화는 지방 사정에도 밝아 특파단의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적 지역에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특파단의 활동은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는 기반이 되었다. 1941년 1월의 한국광복군 지대 편성 당시에는 제1지대에 소속되었다.
1942년 광복군의 직제가 개편될 때 총사령부 참모처 제1과의 참모로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당시 총사령부 서무과 과장으로 활동하였다. 1944년 10월에는 총사령부 부관처장(副官處長)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5월 총사령부 부관실(副官室) 주임에 선임되었다.
이러한 광복군 활동 외에 정당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43년 3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중경시 제3구(區) 비서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활동 방략에 대한 이견으로 같은 해 10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유동열(柳東說) 등과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朝鮮民族革命者統一同盟)을 조직하였다. 1945년 2월에는 홍진(洪震) 등과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민보(新韓民報)(1941. 3. 20)
- 국민보(國民報)(1945. 8. 1)
- 북경재류조선인(北京在留朝鮮人)의 개황(槪況)(조선총독부 통역관 북경파견원, 1927. 5. 2)
- 한국인김성숙등불준령정교상편청핵판(韓國人金星淑等不遵令呈交像編請核瓣)(경사경찰청총감, 1925. 9. 28)
- 외사월보(外事月報)(내무성 경보국 외사과, 1944년 2월~9월) 제11권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971) 제1권 310, 314면
- 자료한국독립운동(추헌수, 1971) 제2권 160~161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5) 제6권 61~6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9권 59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1권 194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제22권 21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9) 제34권 202, 147~148, 227~228, 231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9) 제37권 549, 603, 608면
-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국가보훈처, 2002) 제1권 48면
- 한국광복군명단(광복군동지회, 1977)
- 한국광복군 연구(한시준, 1997) 73~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