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권영욱은 전라남도 목포의 목포공립상업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9년 4월 사회과학 연구를 목적으로 학우들과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독서회원들은 같은 해 6월 식민지교육에 항거하여 ‘민족차별 철폐’, ‘일본인 교사 배척’ 등을 표방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光州)에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으로 많은 학생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독서회원들은 진상 파악을 위해 이인형(李麟炯) 등을 광주에 파견하였다. 이인형 등의 광주 진상 보고를 듣고 독서회원들은 일제의 민족차별적 조치에 항거하여 시위운동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이천만 피압박 민중 제군이여」 등 3종의 격문 1,500여 매를 제작하였다. 시위방법은 학생들을 3개 대로 편성하여 2개 대는 학교 앞, 1대는 송도공원에 집합하여 선전 격문을 살포하면서 시위행진하는 것이었다. 11월 19일 50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집결하여 적색 소기를 흔들며 목포역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송도공원(松島公園)에 집결한 1대는 경찰의 제지로 격문만을 살포하고 시위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권영욱은 시위에 참여하여 학교 측이 경찰에 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화선을 절단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30년 3월 2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불복 공소하여 1930년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출옥 후 1932년 7월경 독서회를 조직하고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반대하는 반제동맹(反帝同盟)을 결성하였다. 이후 실천 부서를 정하고 조직을 강화하는 등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1934년 12월 14일 기소유예되었다. 두 차례에 걸쳐 총 1년 2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예심종결결정서(豫審終結決定書)(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1930. 2. 24)
- 판결문(判決文)(광주지방법원:1930. 3. 20)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0. 6. 21)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동아일보(東亞日報)(1930. 1. 9, 2. 28, 3. 4, 3. 15, 3. 22, 3. 29, 1934. 3. 22, 4. 17, 5. 27, 12. 6)
- 중외일보(中外日報)(1930. 1. 6, 3. 5, 3. 14, 3. 15)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1. 15, 3. 3, 3. 15, 3. 16, 3. 21, 7. 30, 1934. 4. 15, 1936. 1. 29)
- 매일신보(每日申報)(1930. 3. 3, 3. 8, 3. 20, 3. 23, 6. 1, 7. 29, 7. 30, 1936. 1. 28)
- 신한민보(新韓民報)(1930. 4. 17)
-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1934. 12. 7)
- 사상월보(思想月報)(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1) 제1권 제6호 547면
- 학적부(學籍簿)(목포공립상업학교)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13집 267~273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제9권 565~57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