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3월 12일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長連面) 동부리(東部里) 장련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1919년 2월 28일에 해주(海州)·서흥(瑞興)·연백(延白), 3월 1일에 수안(遂安)·옹진(甕津)·황주(黃州), 3월 2일에 곡산(谷山) 지역에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3월 1일 해주 남본정 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고 3월 2일 옹진과 황주에서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은율에서는 장련면과 은율면(殷栗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장련에서 3월 8일 오후 5시경 이도면(二道面)의 숭실학교(崇實學校) 교사 김창덕(金昌德)은 귀가해 유원식(柳元植)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민족대표 33인 명의의 「독립선언서」 1매가 동봉되어 있고, 선언서의 등사 인쇄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그날 저녁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3월 10일 오전 9시경 나무 행상(行商)을 통해 유원식에게 전달했다.
3월 12일 장련 장날에 약 3,000명의 군중들이 동부리 장터에 집결했다. 안악(安岳) 치화리(致花里) 봉삼학교(奉三學校) 교사 정재염(鄭在炎)은 학교로 가던 중에 유원식을 만나 “오늘 장련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친다”는 계획을 듣고 만세시위 참가를 결심했다. 정오가 되자 시위 주도 인물들이 「독립선언서」를 시장 군중들에게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권유했다.
진명학교(進明學校) 교사인 임창연(林昌椽)도 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며 군중을 이끌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봉석(李奉錫)도 자신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련경찰서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가 오후 2시에 군중 진압에 나섰다. 이로 인해 47명이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정재염은 이러한 장련 지역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장련경찰서 경찰에 체포되어 신문조사 후 해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평양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한 결과 7월 9일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1년형이 확정되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8. 30)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9. 13)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15)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14보, 1919. 3. 13)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 1919. 10. 2)
- 대정(大正)8년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황해도장관, 불온사건에 관한 보고, 1919. 3. 18)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303~30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