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안성에서 1919년 3월 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陽城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오후 8시경 안성 읍내에서 약 50명이 독립만세를 외쳤으나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경찰에 탐지되어 18명이 체포됐다. 3월 28일부터 안성 읍내와 원곡면(元谷面)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이루어졌다. 4월 3일까지 이죽면(二竹面)·양성면·일죽면(一竹面)·삼죽면(三竹面) 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양성면에서 4월 1일 면내 각 마을 주민들이 면 소재지 동항리에 집결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명목리(名木里)에서는 황영연(黃永淵)과 오탁영(吳鐸泳)·남상윤(南相胤)·심의태(沈宜台)·유진권(兪鎭權) 등 20~40대의 청장년층이 주도하여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양성으로 갔다. 그리고 석화리(石花里), 구장리(舊場里) 등 주민들도 양성 읍내에 도착했다.
오후 9시 전후하여 양성 읍내 동항리에 도착한 1,000명에 이르는 군중들은 주재소로 이동했다. 동향리 마을 동쪽 주재소에는 순사 1명과 순사보 2명만이 있었으나 군중들은 단지 평화적인 독립만세만을 외치고 흩어졌다. 오후 10시 즈음에 원곡 방면에서 1,000여 명의 군중들이 횃불이나 등불을 들고 양성 읍내로 들어왔다. 최은식(崔殷植) 등이 이끄는 군중들이 양성 면민들에게 함께 독립운동을 할 것을 요구해 양성, 원곡의 면민들의 연합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황영연은 양성면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결과 체포되어 안성경찰서에 압송됐다. 1919년 4월 10일 경찰서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 60도의 즉결처분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20. 3. 22)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0. 8. 10)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21. 1. 22)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21. 2. 24)
- 범죄인명부(犯罪人名簿)(양성면사무소:안성경찰서, 1919. 4. 10)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4. 17, 4. 19)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전보 전국 각지의 시위 상황, 1919. 4. 2)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소요사건에 관한 상황 1919. 3. 26~1919. 4. 5, 1919. 4. 7)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175~17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