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홍재하는 경기도(京畿道) 양주군(楊州郡) 서종면(西宗面) 문호리(汶湖里)에서 출생하였다. 1910년 조국을 떠나 만주를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고, 그곳에서 부인과 아이 셋을 두고 살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부인과 자녀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러시아 군대를 따라 다녔던 것 같다. 그는 500여 명의 한인 노동자들과 함께 러시아 북해(北海)의 전략적 요충지인 무르만스크(Murmansk)라는 항구도시에서 노동을 하게 되었다. 홍재하 등 한인 노동자들은 무르만스크의 철도회사에 고용되어 철로 수선, 잡역 등에 종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철도회사에 고용되어 있던 한인 노동자들이 해고를 당해 오갈 때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무르만스크 한인 노동자들은 1919년 9월 파리위원부에 자신들을 구출해 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11월 무르만스크에서 철퇴하는 영국군대의 보호로 홍재하를 비롯한 한인 노동자들이 영국 에딘버러(Edinburgh)에 도착하였다. 홍재하 등 35명의 한인 노동자들은 11월 19일 파리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진 마른 스위프에 도착하여 전후 복구작업을 했다.
홍재하 등 한인 노동자들은 스위프에서 제1차 대전으로 파괴된 건물·철도 등을 복구하는 공사에 투입되었다. 한인 노동자들과 유학생들은 1920년 1월경 스위프에서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라는 한인단체를 결성하였다. 재불 한인 노동자와 유학생들은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조국의 독립에 일조하고자 하였다. 재법한국민회는 1920년 3월 1일 쉬이프에서 3.1독립선언 1주년 기념식을 열었다. 이 기념식에서는 유럽 각 지역의 한인 외에 파리위원부 관계자들도 참석하였다.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이후 파리위원부는 유럽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재법한국민회의 회원들은 재정적으로 파리위원부를 후원했다. 홍재하 등 한인 노동자들은 1920년 당시 6개월 동안 6천 프랑의 독립운동 자금을 파리위원부에 보냈다.
재법한국민회의 초대 회장을 맡은 허정(許政)이 1920년 7월 미국으로 떠났다. 제2대 회장에 홍재하가 선출되었다. 홍재하는 재법한국민회 회원들이 힘겨운 노동으로 벌은 돈을 파리위원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냈다. 1920년 10월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를 결성해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선전하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0월 12일 밀라노에서 개최된 ‘국제연맹옹호회연합회’에 참가했던 이관용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홍재하는 1923년 재법한국민회를 개편해 ‘파리한인친목회’를 조직하여 그 명맥을 이어 나갔다. 그는 파리에서 상업에 종사하다가 1926년 프랑스인 마리 루이즈 듀보아(Marie-Louise Dubois)와 결혼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항공기 제작 공장에서 근무했다. 그런 중에도 프랑스나 벨기에의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 독립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해방 후에는 매년 3.1절과 광복절이 되면 집에 태극기를 내달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 한국적십자회를 통해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했다. 주불 공사로부터 1950년 11월 13일자로 감사의 서한을 전달받았다. 1950년 중후반 격월간 회지인 L’Amicale coréenne와 SINAPE 등을 발간하여 해방 이후 프랑스 한인들의 명맥을 유지해 갔다. 1960년 2월 10일 파리 교외 콜롱브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신문(獨立新聞)(1920. 5. 11)
- 구주의 우리 사업(1920년)(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2008) 제23권 9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