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마춘걸은 190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자유시참변 이후 1921년 8월 16일 군비단 군사부는 연해주 이만(현재 달네레첸스크)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명의를 ‘고려혁명의용군’으로 개칭했다. 군제는 1개 대대에 3개 중대로 편성했으며, 사관양성속성과를 두어 군사교육을 힘썼다.
러시아 백위파가 이만 전선에서 공격해 오자 고려혁명의용군은 동원령을 내려 각지에서 훈련 중인 한인 군인들을 이만으로 집결시켰다. 고려혁명의용군은 제1중대장 임표, 제2중대장 한운용, 제3중대장 김홍일을 임명하였다. 제1중대와 제3중대는 우수리강 전선을 맡았다. 제2중대는 한 초로크촌에 있다가 이만으로 갔다.
마춘걸은 한운용의 제2중대 제1소대장으로 이만전투에 참전했다. 마춘걸이 소속된 제2중대는 모로봉에서 백위파를 격퇴시켰다. 이후 이만 정거장으로 돌아왔지만, 이만 정거장은 이미 러시아 백위파 수천 명의 진지가 되었다. 한운용이 지휘하는 제2중대 62명은 1921년 12월 4일 오후 1시경 이만으로 진격하여 정거장을 점령하고 있는 백위파 군대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무라비요프로부터 출동한 수천 명의 백위파군이 진격해 왔다. 마춘걸이 소속된 제2중대는 백위파 6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탄환이 부족하여 패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에서 중대장 한운용을 비롯한 대원 46명이 전사하였다. 마춘걸은 총창 17곳을 입었지만,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마춘걸은 1923년 2월경 최계립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적기단(赤旗團)이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적기단은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행동조직이었다. 동녕·목릉 등 여러 지역에 지단을 두었다. 1924년 7월 단장 최계립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회의를 열었다. 마춘걸도 여기에 참여했다.
1925년 10월 1일 적기단장 최계립은 영안현(寗安縣) 황기둔(黃旗屯)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북만 및 북조선 국경지방 일대에 공산주의 및 독립사상의 선전하려면 간도지방에서 자금을 모집하기로 했다.
적기단 단원들은 목적을 달성하고자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고 마춘걸을 모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마춘걸이 이끄는 모연대 제1분대와 제2분대는 간도지방, 제3분대와 제4분대는 주로 국경지방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했다. 1925년 11월 ‘김군삼(金君三)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중국 관헌은 이를 계기로 적기단을 탄압했으며, 적기단은 활동을 추진해 나갈 수 없었다. 마춘걸 등은 1926년까지 활동을 이어갔지만, 적기단을 결국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레닌그라드 국제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그는 1937년 9월 28일까지 145 카스트롬 사격부대 부대장으로 복무했다. 1937년 10월 2일 ‘스탈린 대탄압’을 받아 간첩 및 반혁명조직죄로 체포되었다. 1938년 1월 13일 법정 최고형을 선고 받았다. 1957년 9월 27일 쁘리까르빠트스키 군사령부 군법재판에서 복권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십월혁명십주년과 쏘베트고려민족(1927년) 70~75면
-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윤상원, 고려대박사학위논문, 2009) 258~268면
- 사진 : 독립기념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