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평양(平壤)의 숭의학교(崇義學校)를 졸업했다. 1920년 4월 1일부터 황해도 봉산군 사원면(沙院面) 사리원(沙里院)의 기독교계 학교인 사립 왕성학교(往盛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7월 이래 김치현(金致鉉)과 만나 여자청년회(女子靑年會) 조직을 준비하였다. 먼저 박경애(朴敬愛) 등 10여 명의 입회자(入會者)를 모집한 뒤 연명서를 작성하여, 예수교 면려청년회(勉勵靑年會) 회장 김우범(金禹範)에게 보내 허가를 요청하였다. 여자청년회는 음력 10월경에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여자청년회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921년경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기독여학교(基督女學校)에서 수학했다. 1924년 동명학원(東明學院) 영문과(英文科)에 입학하였다. 한국 유학생들의 편의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설립된 화동한국학생연합회(華東韓國學生聯合會)의 집행위원부가 1923년 가을에 난징으로 옮겨오자, 재무담당을 맡았다.
1924년 2월 7~8일 난징 성내(城內)의 협진회관(協進會館)에서 개최된 흥사단(興士團) 제19회 원동대회(遠東大會)에 비단우(非團友) 자격으로 참관했다. 4월 26일 흥사단에 입단 청원서를 냈다. 5월 3일에 정식으로 입단 허가를 받았다. 1925년 선우혁(鮮于爀)을 단장으로 한 원동단우반(遠東團友班)에서 활동했다. 이후 귀국하여 흥사단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1927년 초 상하이에서 들어온 선우훈(鮮宇燻)이 체포된 사건과 관련하여 한때 수배를 받았다. 흥사단 제15회 원동대회가 개최된 1928년 8월 당시에는 희락회(喜樂會) 회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주요한(朱耀翰) 등을 중심으로 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의 지방회원으로 활동했다. 1931년 9월 1~2일 제1회 하기(夏期) 수양회에 참석하여 즉석에서 회관 건립을 위한 기금도 냈다. 1932년 1월 20일 수양동우회 평양반우회(平壤班友會)의 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당시 안창호와 의남매지간이자 근우회(槿友會) 평양지회 등에서 활동하던 조신성(趙信聖)과 함께 평안남도(平安南道) 대동군(大同郡) 대보면(大寶面) 태평노리(太平奴里)에 거주하면서, 산파(産婆)로 일하였다. 9월 13일 근우회 평양지회관에서 열린 평양여자소비조합(平壤女子消費組合) 조직준비회에서 준비위원이 되어 정칠성(丁七星)과 함께 규칙을 기초(起草)했다.
1937년 6월 이래 이른바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나 평양 및 선천(宣川) 일대에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일었다. 이때 일본 도쿄(東京)에 체재 중이었던 그녀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졌다. 1938년 10월 28일 고향집에 돌아왔다. 11월 7일에 사리원경찰서(沙里院警察署)에 체포되어 서울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로 압송되었다. 석방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1940년 흥사단 원동지부가 해산될 때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3. 10. 4, 1924. 3. 9, 1926. 1. 13, 2. 6, 1932. 9. 17, 1934. 9. 17)
- 도산안창호전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0) 제8권 99, 116, 135, 351, 355, 357, 434, 445, 499, 917면, 제9권 314, 325, 547, 550, 772, 849, 1036면, 제10권 192, 261, 269, 308, 310, 351, 363, 475, 9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