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신천군의 3.1만세시위는 문화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3월 11일 오전 11시경 문화장날을 기해 기독교인 30여 명이 동각리 장터에 모여 독립을 선언한 다음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러자 시위대는 순식간에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출동한 헌병이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저지하면서 주동자들을 체포하였다.
신천읍의 시위는 기독교인의 주도로 3월 27일에 시작되었다. 정오 무렵 무정리 장터에서 2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장터에 모인 장꾼들은 물론 군수 장유도 감격에 넘쳐 만세를 부르자 시위는 절정에 달하였다. 만세시위를 저지하려는 헌병과의 충돌이 시작되면서 상점들은 철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헌병들의 발포로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이 생기며 시위대열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10여 명의 주동자도 체포되었다. 시위는 밤에도 계속되어 여기저기 산마루에서 만세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에도 읍내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고 만세시위로 모두 75명이 체포되었다.
곽영선은 신천읍 만세시위를 위하여 3월 24일 태극기를 준비했다. 3월 27일 신천읍 무정리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다시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9. 11)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201~20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