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손병희(孫秉熙) 등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경남도 신흥군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다. 동지 2명과 함께 함경남도 신흥군에 위치한 사립 가평보통학교(加平普通學校) 학생 약 40여 명을 이끌고 신흥군 가평면(加平面) 중리(中里)와 동흥리(東興里)·중양리(中陽里)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3월 15일 다시 가평보통학교 학생 30여 명을 이끌고 신흥군 원평면(元平面) 중리(中里)에 위치한 원평장 시장(元平場 市場)으로 나아가, 원평장 시장에 모인 사립 원평보통학교(元平普通學校) 학생 30여 명과 집결한 군중 400여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3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위반(保安法違反)’을 이유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징역 3월로 감형되었고, 1920년 7월 27일 출옥하였다.
1923년 봄에 중국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한 후, 적기단 간부였던 이민환(李珉煥)을 만나 적기단 활동에 뜻을 함께하기로 결의하였다. 적기단은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원동인민위원회 고려부(高麗部)에서 활동하던 이동휘(李東輝) 등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 계열의 인물들이 조직한 항일단체였다.
1924년 7월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의 박용하(朴鎔夏)로부터 군자금 15,000원을 받기로 약속을 받고, 현장에서 군자금 5,000원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길림성에 본부를 두고 있던 적기단과 연락을 유지하고, 단원들의 왕복과 비밀문서 교환, 사회주의 사상의 선전,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기 위한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홍도(洪濤, 일명 홍진의[洪震義])와 함께 적기단 후원회 설치를 협의하였다.
1924년 8월 중순 무렵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삼봉역(三峰驛)의 임개학(林開學)과 중국 길림성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의 한세진(韓世鎭)을 만나 적기단 본부와 국내의 비밀연락을 취할 비밀문서의 통신과 무기 반입을 돕기 위한 거점을 설치하는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의해 1924년 8월 말 서울에서 체포되어 1925년 3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을 이유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9년 11월 27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0. 3. 29)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20. 4. 26)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4. 11. 24)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5. 3. 12)
- 가출옥관계서류(假出獄關係書類)(경찰청)-가출옥집행제(假出獄執行濟)의 건(件) 보고(報告)(함흥형무소장:1928. 7. 7)
- 동아일보(東亞日報)(1920. 4. 12, 1924. 8. 27, 8. 31, 9. 8, 11. 26, 1925. 1. 15, 1. 17, 3. 4, 3. 13)
- 조선일보(朝鮮日報)(1924. 8. 23, 8. 25, 8. 28, 8. 30, 8. 31, 10. 10, 11. 26, 11. 29, 1925. 2. 21, 2. 25, 3. 4, 3. 5, 3. 11, 3. 13)
- 매일신보(每日申報)(1924. 8. 30, 8. 31, 1925. 1. 17, 3. 3, 3. 4, 3. 13, 3. 24)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만주(在滿洲)의 부(部)(41)(남북만주(南北滿洲)의 불령선인(不逞鮮人) 단체(團體) 조사(調査)의 건(件), 합이빈총영사(哈爾賓總領事):1925. 5. 2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738~740면
-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강만길・성대경, 1996) 369~37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