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0년 12월 19일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한 안명근 등의 거사 계획에 참여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사촌동생인 안명근은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 남만주(南滿洲)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할 목적으로 황해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한때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난 뒤에도 황해도 일대에서 활동을 계속했는데, 박형병은 한순직(韓淳稷)·원행섭(元行燮)·양성진(楊星鎭)·고봉수(高奉守)·한정교(韓禎敎) 등과 함께 이에 참여하였다. 안명근 등은 자산가가 많은 황해도 안악읍(安岳邑) 내에서 자금 모집을 계획하고, 1910년 12월 19일 안악읍에 있는 원행섭의 집에 모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날 밤 이들은 읍내 자산가의 성명, 자산 규모,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의 위치,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 등을 조사하여 기록해두었으며, 12월 20일 밤 11시경 교외의 남산 습락현(習樂峴)에서 모이기로 하였다.
박형병은 12월 20일 밤 남산에서 집합하기에 앞서 원행섭·한순직과 함께 헌병분견소와 그 부근 일본인 가옥의 상황을 정찰하였다. 그리고 안명근 등과 함께 권총을 휴대하고 습락현으로 가서 김구(金龜) 등과 합세하여 읍내로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거사 당일에 모인 인원이 예상보다 적었고 또 안악읍 내의 자산가는 음력 12월 이전에는 거액의 현금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당일의 거사는 연기하고 음력 12월 15일 밤에 다시 모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1911년 1월 10일경 안명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거사는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한국인의 항일독립운동을 주시하고 있던 일제는 안명근 등의 활동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모금 활동’으로 날조하여, 신민회(新民會) 회원을 비롯한 전국의 항일운동가들을 탄압하는 계기로 삼았다. 전국적으로 600여 명을 검거하여 온갖 고문을 가한 끝에 결국 105명에게 실형을 선고한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확대시켰던 것이다. 박형병 역시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 및 강도미수’ 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으나, 9월 4일 경성공소원(京城控所院)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2년 9월 13일 이른바 ‘은사(恩赦)에 관한 조서(詔書)에 따른 특전(特典)’으로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으며, 이후 1914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칙령(勅令) 제104호에 의거하여 징역 3년 10월 10일로 감형되었다. 1915년 3월 12일 서대문감옥(西大門監獄)에서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재판소:1911. 7. 22)
- 판결문(경성공소원:1911. 9. 4)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1915. 3. 20)
- 매일신보(每日申報)(1911. 7. 23)
- 신한민보(新韓民報)(1911. 8. 9, 8. 16, 8. 23)
- 경향신문(1976. 8. 28)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14집 805~811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215, 216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7권 255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0권 667~6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