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7년 음력 12월 1일 이래 강원도 이천군 웅탄면(熊灘面) 평리(坪里)에 있는 강경하(姜景夏)의 집에서 운영하던 서당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주로 9~14세의 서당 학생 홍석범(洪錫範) 등에게 비밀리에 구한국(舊韓國) 시대를 언급하면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창가 책에서 「운동가(運動歌)」, 「감동가(感動歌)」 등의 창가를 들려주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운동가」의 내용은 “대한국만세(大韓國萬歲)의 부강기업(富强基業)은 국민교육을 전수함에 있고, 청년 학도는 용감한 정신으로 함께 활동하여 태극기 아래 집합해야 한다”는 취지이며, 「감동가」의 내용은 “4천여 년의 역사를 갖는 구한국의 민족은 지금 그 전토모옥(田土茅屋)을 빼앗기고 강산은 색(色)을 잃고 일월(日月)은 광명을 잃은 이 가을에 마땅히 청년 각자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잊지 않고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의 기(旗)를 세워 자유의 종(鍾)을 울려 부모의 걱정을 안심시키고, 대한반도(大韓半島)의 광명한 천지(天地)에 나라를 건설하는 영웅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한편 이금석은 1917년 음력 11월 이래 강원도 평강군(平康郡)에서 김우현(金右鉉)으로부터 어업용(漁業用)이라며 뇌관(雷管)과 도화선(導火線), 다이너마이트 등의 화약류를 건네받아, 이를 1918년 4월 19일경까지 평리에 있는 자택에 숨겨두었다. 이로 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총포화약류단속령시행규칙(銃砲火藥類取締令施行規則)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3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0월 23일 출옥하였다. 1927년 은사감형(恩赦減刑) 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9. 29, 예심종결결정)
- 판결문(경성지방법원:1918. 9. 30)
- 판결문(경성복심법원:1918. 10. 23)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구미(在歐米)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