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20~1921년 황해도 해주군(海州郡)에서 주비단(籌備團)과 제화교(濟化敎)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2월경부터 1921년 3월경까지 유상렬(柳相烈)이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용도면(龍道面)에서 조직한 주비단과 유상렬 일파인 황문섭(黃文燮)이 조직한 제화교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유상렬은 조맹선(趙孟善)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원으로서, 그의 지시로 국내로 들어와 주비단을 조직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제화교는 증산교(甑山敎)를 모태로 1910년 이래 각지에서 난립한 결사적 성격의 교파들 가운데 하나로 나중에 삼덕교(三德敎)로 개칭되었다.
주비단은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보내온 「주비단규칙(籌備團規則)」을 기초로 황해도와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였다. 주비단은 자료나 지역에 따라 '임시군사주비단' 또는 '대한독립군사주비단'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 임시정부는 이를 국내의 연통제(聯通制)나 교통국 등과 연계하여 국내 군사조직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었다. 황해도 주비단은 편제상 분단(分團), 소단(小團), 연단(聯團)으로 조직되었고,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하였다. 10명으로 분단을 만들고 그 위에는 소단과 연단을 두었으며, 사령관이 전체 조직을 통솔하였다. 본부는 황주군(黃州郡)에 있었으며, 각 지역에 지부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황해도 주비단의 주요 활동은 의열투쟁과 군자금 모집이었으며, 단원은 약 130명 정도였다.
박창영은 당시 황해도 주비단 소단장이었던 유상렬이 연백군 용도면에 지부를 설치할 때 주비단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12월경부터 1921년 3월경까지 주비단원 안인학(安仁學)ㆍ신용섭(申容燮)ㆍ김종기(金鍾基)ㆍ김일제(金一濟)ㆍ오수남(吳壽男) 등과 함께 해주군 일대에서 단원 및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현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음을 받는 등으로 해서 약 5천 원의 군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다.
1921년 6월 28일 해주지방법원(海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강도죄 등으로 징역 5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같은 해 10월 11일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에서 기각되어 평양형무소(平壤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21. 10. 31, 1930. 2. 14)
- 每日申報(1921. 10. 6, 10. 14)
- 이성우, 주비단의 조직과 활동(한국근현대사연구 25,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