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07년 음력 10월과 1909년 윤 2월 사이에 경북 선산군(善山郡)ㆍ개령군(開寧郡), 충북 황간군(黃澗郡) 일대에서 박타관의진(朴他官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교형(絞刑)을 받고 순국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국권 회복을 위해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박타관도 의병을 모집하여 경북 선산군ㆍ개령군 등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곽이용은 박타관의 부하로서 1907년 음력 10월경 9명의 의병과 함께 경북 선산군 삽재리(揷在里)ㆍ다부동(多富洞), 개령군 송곡리(松谷里), 금산군(金山郡) 봉학동(鳳鶴洞)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9년 음력 1~2월 사이에 여러 명의 의병과 함께 충북 황간군 매하면(梅下面) 교동(橋洞)ㆍ임산리(林山里), 상촌면(上村面) 하물한리(下物閑里)ㆍ하도대리(下道大里), 오곡면(梧谷面) 오곡리(吾谷里)ㆍ광평리(廣坪里) 등지에서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9년 4월 19일 박타관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동지들과 탈옥하였다. 이어서 5월 16일 황간군 오곡면에서 박타관 등과 함께 다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박타관은 일본 관헌이 쏜 총을 맞아 순국하고, 곽이용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1909년 6월 17일 공주지방재판소(公州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ㆍ강도살인ㆍ방화ㆍ죄수도주(罪囚逃走)ㆍ추포항거(追捕抗拒)로 교형을 받았다. 1909년 10월 20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 1910년 1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공소와 상고가 기각되어 1910년 3월 14일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控訴院 : 1909. 10. 20)
- 刑事控訴事件簿
- 逃走暴徒 銃殺 및 逮捕에 관한 건(1909. 5. 18) 暴徒에 關한 編冊(警務局)
- 大韓帝國官報(1910. 3. 18)
- 皇城新聞(1910. 3. 19)
- 大韓每日申報(1910. 3. 19)
- 統監府原案(奎章閣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