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44년 경남 통영군(統營郡)에서 통영공립수산학교(統營公立水産學校)에 재학 중, 일제의 패망과 조선 독립을 예견하면서 침략전쟁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病保釋)으로 출옥한 직후 순국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1943년 8월 병역법을 개정 시행하여 1944년부터 조선 청년들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통영수산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윤재형은 학우들과 함께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고 시국(時局)과 관련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른바 근로봉사대(勤勞奉仕隊)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한편, 조만간 일본이 패망하고 한반도에 미군(美軍)이 상륙할 것이니 이때 조선인은 폭동을 일으켜 각 기관을 점거하고 미군에 협력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1944년 6월 19일 교실에서 급우들에게 "적기(敵機 - 연합군 측 비행기를 말함)가 통영에 와서 폭탄을 수산학교에 투척하면 여름방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7월 초순에는 교실 칠판 위에 걸린 '천황(天皇)의 어진(御眞)과 궁성(宮城) 사진'에 침을 뱉는 등의 행동을 통해 급우들의 항일의식과 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그의 이러한 발언과 행동들은 교내 일본인 학생들에 의해 결국 일본인 교사나 가정으로 전달되었다.
1944년 7월 20일 동료 학생 30여 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24명은 2~3개월 후에 석방되었지만, 나머지 8명은 같은 해 11월 10일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조선임시보안령(朝鮮臨時保安令), 육군형법(陸軍刑法) 위반 등으로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통영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1945년 2월 22일 열린 재판에서 윤재형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불경죄(不敬罪)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았다. 당시 18세 미만의 학생은 인천소년형무소(仁川少年刑務所), 18세 이상은 김천소년형무소(金泉少年刑務所)에 수감한다는 방침에 따라 동급생 허위균(許偉均)과 함께 김천소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5월 22일 형 집행정지로 출옥하였다. 곧바로 고향인 강원도 양양(襄陽郡) 현남면(縣南面) 남애리(南涯里)로 돌아갔으나, 해방을 사흘 앞둔 8월 12일에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1945년 2월 27일부로 통영공립수산학교의 학칙 제18조 제1항에 의거하여 동료 학생들과 함께 퇴학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刑事控所事件簿
- 統水六十年史(統水60年史編纂委員會, 1977) 121면
- 統水七十年史(統營70年史編纂委員會, 1988) 113면
- 이용규의 통영수산학교 학생운동의 건, 하반기 조사보고서(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2008) 7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