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27년 8월경부터 11월 사이에 전라북도 옥구군 서수면(瑞穗面)에서 주식회사 후타바샤(二葉社) 서수농장(瑞穗農場)의 고율(高率) 소작료(小作料)에 항의하는 소작쟁의(小作爭議)에 참여하여 주재소(駐在所) 습격 등을 감행하였다.
1927년 추수기(秋收期)를 맞아 후타바샤 농장에서 75%에 달하는 고율의 소작료를 현물(現物)로 납입할 것을 통보했다.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간부인 장태성(張台成) 등은 농장 지배인을 찾아가 소작료율을 낮춰줄 것을 요구했다. 농장 소작인들도 도조불납(賭租不納) 통지를 농장 측에 발송하는 등 단합된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일본인 농장측은 이러한 요구를 무시했으며, 일제 경찰은 11월 25일 장태성 등 주요 간부들을 구금하였다. 이에 500여 명의 소작인은 옥구농민조합 간부의 검거에 항의하여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를 습격하고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들은 군산경찰서(群山警察署)로 압송되던 장태성이 임피경찰관출장소(臨陂警察官出張所)에서 열차 대기 중임을 알고 출장소로 몰려가 장태성을 구출하였다. 그리고 조합 간부인 박상호(朴相浩)가 서수경찰주재소(瑞穗警察官駐在所)에 인치되었음을 알고, 곧바로 그를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군산경찰서에서는 곧바로 경관대(警官隊)를 파견하여 80여 명의 조합원과 농민 등을 검거했다. 채판진은 이때 체포되었다. 후타바샤 소작쟁의는 농장의 소작인 외에 군산지역 노동자와 학생들도 합세하여 더욱 확대된 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채판진은 김행규 등과 함께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12월 8일 동지 40여 명과 함께 이른바 ‘소요(騷擾) 및 구금자(拘禁者) 탈취죄(奪取罪)’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1928년 2월 29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선일보(朝鮮日報)(1927. 11. 28~29, 12. 10, 1928. 2. 5, 3. 1)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11. 29∼30, 12. 10, 1928. 2. 2~4,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