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경기도 용인(龍仁) 출신으로 1907년 김봉기의진(金奉基義陣)에 참여하여 경기도 양구(陽口)·용인·광주(廣州)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봉기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 1907년 7월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완용(李完用) 등 7적을 성토하는 격문과 이등박문(伊藤博文) 및 각국 영사에게 보내는 글, 그리고 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 등을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등에 게재하고자 하였으나 일경에 압수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서 7월 25일 이근풍(李根豊)·주창룡(朱昌龍) 등과 함께 경기도 광주·용인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거의하였다. 김봉기는 동년 9월 2일 이래 포군 70명을 포함한 군사 170여 명을 거느리고 양근·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9월 22일에는 부하 200여 명을 거느리고 여주읍을 공격하여 동장 노만실(盧萬實)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 여주의 포수대장이었던 한성관의진(韓聖寬義陣)과 연합하여 여주읍을 공격하는 등 11월까지 여주·양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12월 초순 서울 중서전동(中署磚洞)에 있는 홍세영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가 붙잡혀 1908년 3월 13일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박춘식은 1907년 음력 7월 김봉기의진에 가담하여 의병 2백여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광주·양천·지평·가평·춘천·횡성·양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고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그는 양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이어서 가평에서 백미 150석과 군자금 200원을 모집하였다. 또 1908년 음력 2월 10일 의병 홍금만(洪今萬)·유태수(劉泰秀)·송금봉(宋今奉) 등과 함께 용인·광주 등지에서 군자금을 수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춘식은 의병의 목적을 "일본군과 접전하여 머리를 깎지 않고 개화인을 축출하여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이라 하였다.
박춘식은 1908년 음력 2월 광주 전지리(前枝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다. 소위 내란죄(內亂罪)로 기소되어 1908년 6월 17일 경성재판소에서 종신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裁判所:1908. 6. 17)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41~4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