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이준명은 전북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둔남면 오수리(獒樹里)에서는 임실군 내에서 제일 먼저 독립 만세의 함성이울려나왔으며, 그것도 10대의 오수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이 3월 10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10여일이 지난 3월 23일에도 오수리에서 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은 마침 오수 장날인데, 임실군의 군수와 면내 중진인물들이 일반민중을 설유하기 위하여 오수에 오기도 하였다. 이 지방의 유지 이기송(李起松), 오병용(吳秉鎔), 이만의(李萬儀) 등은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중 서울을 위시하여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나자,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거사준비를 하다가 이날 오후 2시를 기하여 드디어 만세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사전에 천도교 및 예수교회측과도 연락이 있었던 만큼, 이기송이 시장 앞에 나서서 항일 독립에 관한 일장연설을 하고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고 앞을 다투어 나섰다.
주재소에서 이기송을 끌고 갔으나 대열은 해산되지 않았다. 오병용, 이병렬(李秉烈), 이만의, 김일봉(金一奉) 등의 뒤를 따라 만세 부르는 군중은 점점 증가되어 800여 명의 대열이 주재소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며 나가고, 약 80명이 주재소 안으로 밀려들어가며 애국자를 내놓으라고 고함치니 당황한 일본인 순사는 그만 이기송을 내놓게 되었다.
시위대열은 다시 이기송을 얼싸안고 환호성을 올리며 시장으로 돌아와서 만세를 부르니 군중들은 점점 증가하여 그 수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장은완전히 철거되고 일본인 상점은 파괴되었다. 만세의 대열은 다시 면사무소로 향하여 면장·면서기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환성을 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서 주재소를 향하여, 돌을 던져 주재소의 창과 벽시계 등을 파괴하고 유치장을 부수어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하였다. 또한 이준명은 시장에 잔류한 군중을 이끌고 일본인들의 집을 습격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이준명은 5월 27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소위 소요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오히려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그는 다시 항소하였으나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光州地方法院 全州支廳:1919. 5. 27)
- 受刑人名簿
-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18)
- 判決文(大邱覆審法院:1919.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