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서울의 사립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상과(商科)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전문부에 다니다가 중퇴했다. 보성전문학교 재학 시절부터 사회주의에 대해 학습하였다. 1925년 4월 30일 경상남도 하동군의 하동소년회(河東小年會) 총무, 하동청년연맹(河東靑年聯盟) 상무집행위원을 맡았다.
1926년 4월 27일 하동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서 하삼청(河三淸)과 함께 소년부(少年部)를 담당했다. 1927년 8월 10일 하동유학생간친회(河東留學生懇親會)에서 「학생운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아 강연회가 해산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1928년 9월 8일 하동농민회(河東農民會) 임시총회에서 서기로 뽑혔다. 1929년 7월부터 경상남도청년연맹(慶尙南道靑年聯盟)의 조사통계부에서 활동했다.
1930년 5월 25일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에서 전국군부동맹(全國郡府同盟) 대표자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의 집회금지 처분으로 무산되었다. 이때 그는 하동청년동맹을 대표하여 그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서울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남산여관(南山旅館)으로 주거를 옮겨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다. 9월 22일 중앙청년동맹(中央靑年同盟)에 몸담았다. 11월 조선청년총동맹에서 전설대회(傳說大會)를 열어 새로이 간부진을 선출할 때 중앙집행위원에 뽑혔다. 12월 이래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京城支會)의 조사부 부원 등으로 활동했다.
1930년 8월 상순경 정종명(鄭鐘嗚)의 소개로 오산세(吳祘世)와 만나 운동의 방향을 논의했다. 10월 상순경 서울 남산(南山) 조선신궁(朝鮮神宮) 부근에서 비밀결사인 ‘조선공산당재건설(朝鮮共産黨再建設) 준비위원회’에 가입했다. 20일경 오산세의 지시로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로 가서 부산지역의 노동운동 상황을 조사했다. 1931년 3월 ‘조선좌익노동조합전국평의회(朝鮮左翼勞動組合全國評議會) 조직준비회’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하고자 부산으로 파견되었다.
1931년 4월 ‘조선공산당재건 국내공작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에 체포되었다. 9월 11일 검찰로 송치되었다. 1934년 6월 25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출옥 후 함경북도(咸鏡北道) 청진부(淸津府)에 갔다. 여기서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활동했다. 1936년 8월 2일 청진기우회(淸津記友會)에서도 활동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6. 4. 30, 1927. 8. 16, 1928. 4. 26, 6. 24, 1929. 7. 25, 1930. 11. 23, 12. 26, 1931. 1. 24, 9. 12, 12. 17, 1932. 12. 23, 1933. 4. 28, 1934. 5. 24, 5. 29, 6. 2, 6. 26, 1936. 8. 6)
- 사상휘보(思想彙報)(조선총독부검사국, 1938) 제14호 245면
-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