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노영숙은 1919년 3월 함남 함흥군(咸興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2월 26일 평양숭실중학교 교사 강봉우(姜鳳羽)는 신창리(新昌里) 교회 에서 목사와 장로 등에게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의 동향과 세계 속 의 한국의 처지를 소상히 설명하였다.
이때 원산광석동교회 장로 이순영(李順 榮)이 함흥으로 달려와, 중하리(中荷里)교회에서 간부들에게, 원산에서는 1일에 거사한다는 것을 알려 주고 함께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에 교회 간부들은 숙의를 거듭한 끝에 거사일을 장날인 3월 3일로 정하였다.
노영숙은 2월 28일 중하리교회에서 강봉우로부터 3월 3일에 함흥읍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할 것이 라는 연설을 들었다.
이에 앞서 함흥고등보통학교, 함흥농업학교, 영생중학교 학생으로 구성된 함 산(咸山)학우회에서도 은밀히 만세시위계획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 역전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고 밤을 세 워 이 일을 각 학교의 지도급 학생들에게 연락하였다.
그런데 3월 2일이 되자 위의 계획과는 관련이 없이 이미 시민들이 산발적으로 시위를 전개하였다.
미 리 계획되고 동원된 집회는 아니었지만 의외로 많은 군중이 호응하여 큰 시위 가 벌어졌고, 300여명이 체포되었다. 놀란 경찰은 3일 새벽 함흥 전 시내에서 대규모의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이 바람에 기독교계의 지도자와 함산학우회 간부들이 체포되었다.그러나 시민들은 굴하지 않고 3월 3일 대규모의 독립만세시위를 시작했다. 노 영숙도 3일 정오경 약 400명과 함께 중하리, 하동리 등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 르며 시장 쪽으로 행진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노영숙은 1920년 4월 15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東亞日報(1920. 4. 23)
- 刑事控訴事件簿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692~696면
- 判決文(京城覆審法院:1920. 5.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