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5년 그의 아들
3. 1907년 그의 아들
4. 1907년9월3일
5. 1907년10월2일
6. 1907년10월29일
7. 1907년11월3일
8. 1907년11월4일
9. 1907년11월8일
10. 1907년11월16일
11. 1907년12월5일
12. 1907년12월7일
13. 1907년12월8일
14. 1907년12월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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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북 영천(永川) 출신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기가 과인하여 이미 12살 때 지방 백일장에서 장원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887년에 북부도사(北府都事)에 제수되었다가 이듬해인 1888년 의금부의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발발하자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을 제수받고 동학군 토벌에 임하였다가 그 해 겨울 토포사(討捕使)를 제수 받고 황해도로 갔다.
그리하여 구월산에 모여 있던 동학군을 권유하여 평정한 뒤 이듬해 봄에 상경하여 그 공로가 인정됨에 태의원(太 院) 시종관의 직을 제수받게 되었다.
1899년에 삼남검찰 겸 토포사가 되어 삼남으로 내려갔다가 그 해 8월에 다시 상경하여 시종관으로 재직하던 중 11월 20일 밤 종묘에 불이 나자 금군(禁軍)을 불러 4문을 잠그고 종묘로 가서 불속에서 묘주(廟主)를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안치하였다.
또한 이 지역에 이르는 황제와 태자를 모시고 피신케 하니 이에 황제는 정환직을 사랑하여 금은 패물 등을 하사하고 1900년에 원수부위임(元帥府委任) 겸 3남관찰사를 제수하였고 동년 겨울 도찰사(都察使)에 임명하였다.
다시 황제의 명을 받고 경주에서 올라온 선생은 국사를 비관하고 사직을 청하니 황제가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에 제수하고 물러감이 옳지 않다고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상의한 후 그에게 의병을 일으켜 강원도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명하였으며 자신은 서울로 재차 올라와 관직을 물러난 동지들과 협력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오대산(五臺山)으로 보내서 진에 합세한 후 일제의 감시하에 있던 황제를 모시고 탈출한 후 재차 서울로 진공하여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용기가 이끄는 의병진의 북상계획이 늦어지므로 1907년 9월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에 아들 용기가 입암(立岩)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永川守備隊)를 맞아 격렬히 싸우다 적이 쏜 포탄에 피격되어 전사하니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진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하여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하여 4개 소대로 재편성하고 제1소장에 조재술(曺在述), 제2소장에 남경숙(南敬叔), 제3소장에 안흥천(安興千), 제4소장에 김경문(金敬文)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 해 10월 29일 제1소장 조재술에게 의병 80여 명을 이끌고 흥해(興海)를 습격케하여 우편국 분파소 등을 불태우고 취급소장(取扱所長) 등 3명을 사살하였다.
11월에는 신녕(新寧)을 기습하여 분파소(分派所)에 보관된 총기 60여 점을 탈취하였다.
또한 의흥(義興)을 습격하여 분파소를 방화하고 총기 49정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그 해 11월 8일에는 청송군(靑松郡) 유전(楡田)에서 청송 일본군 주정대(酒井隊)와 접전하던 중 조재술이 관통상을 입었다.
16일에 흥해군 신광(神光)에서 정완생(鄭完生)을 수장(首將)에, 우재룡(禹在龍)을 부장(副將)으로 각각 명하여 다시 흥해를 습격케하여 분파소를 불태우고 일본 순사와 한국인순검 1명씩을 사살하였다.
그 뒤 12월 5일에 영덕(盈德) 부근에서 일헌병 영덕분견대의 야간기습을 받아 남경숙이 전사하자, 이에 분개하여 7일에 부하 83명을 이끌고 영덕을 역습하여 적병 20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경주로 이동하고자 하였으나 영덕군 소택(小澤)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포위 당하자 이튿날 청하군(淸河郡) 각전(角田)에서 부하들에게 해산하도록 명령하고 눈물을 흘리며 동대산(東大山)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산에서 내려와 일본군에 항쟁하려다 12월 11일 새벽 고천(高川)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일본 헌병은 대구로 호송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음에 다시 영천(永川)으로 호송하여 영천 남쪽 교외에서 총살형에 처하니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순국하기 전날 최후로 남긴 시가 있으니 다음과 같다.
몸은 없어지나 마음마저 변할쏘냐.
의는 무거우나 죽음은 가볍도다.
나머지 뒤의 일을 누구에게 맡기리오.
말없이 앉아 있노라니 오경이 되었구나.
(身亡心不變 義重死猶輕 後事憑誰託 無言坐五更)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139·140·141·1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50~353·380~387·578~58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375~40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