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이승창은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초와면(楚臥面) 은파시장(銀波市場)에서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3일(음 3월 3일)에는 봉산군내 초와면 은파리(銀波里)에서 만세운
동이 크게 일어났다. 이 은파리는 삼지강(三支江)을 사이에 두고 재령읍과 마주
앉아 있는 곳으로서 장이 크게 서고, 또 기독교가 일찍 전파된 곳이다. 일찍부
터 이웃해 있는 재령읍 또는 재령군의 남율면(南栗面)·북율면(北栗面)의 교인
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오면서 독립운동을 계획하던 이곳의 기독교인들은
4월 3일의 은파 장날을 기회삼아 만세운동을 크게 일으키기로 합의를 보고, 비
밀히 태극기를 제조하며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다. 이날 장꾼들이 모두 모여들
어 장이 크게 선 오후 1시경에 시장 한가운데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대
열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나오니 시장
안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호응하였다. 만세 소리가 퍼져나감과 함께 수많
은 사람들이 만세행진의 대열에 참가하니 어느 사이 그 수효는 근 1,000명에 달
하게 되었다. 일경은 은파주재소의 헌병은 물론, 사리원방면 헌병·경찰까지 출
동하여 시위행렬의 해산에 진력하였다. 약 40명의 애국동포들이 구속되고, 대열
은 일시 해산되었다. 그러나 밤이 되어 오후 9시경에는 다시 200여 명의 민중이
주재소로 밀려들었다. 구속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서였다. 한 동안 승강이가
벌어졌지만, 결국은 헌병의 무력 저지에 의하여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뒤이어 봉산 읍내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5일에는 약 500명의 만세시위가 있고, 7일과 9일에도 1~200명씩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시위는 계속되었
고 그중 초와면 양동리(養洞里) 같은 곳에서는 그해 가을 10월 중에도 100명이
모여서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이승창은 6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高等法院:1919. 8. 28)·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277~27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