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신한규는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금천군에서는 3월 3일 서천면(西泉面) 시변리(市邊里)에 독립선언서를 붙인
일이 있었고, 7일에는 토산(兎山)지역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들의 만세시위도 있
었다. 그러나 만세운동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 해 4월부터였다.
4월 1일에 먼저 백마면(白馬面) 용성리(龍城里)에서 이상로(李祥老)·황찬 등
80여 명이 집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러 기세를 올렸다. 이튿날인 2일부
터는 만세시위가 점점 크게 전개되었다. 오후 1시경에 백마면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80여 명은 다시 현내면(縣內面) 송정리(松亭里) 방면으로 진출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개시했다. 이날 합탄면(合灘面) 매후리(梅後里) 부근
과 고동면(古東面) 구성리(鷗城里)에서도 2차례에 걸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튿날인 4월 3일 오후 2시경에는 현내면 송정리에 다시 300여 명이 집합하여
역시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하여 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같은 날 새벽에 구
이면(口耳面)의 관문리(冠門里)·문성리(文城里) 주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헌병주
재소로 나아가 충돌이 빚어졌다.
금천군의 만세운동은 5일, 6일에도 계속되었다. 산외면(山外面) 신명리(新明
里)에서는 6일에 6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신한규는 8일에 독립만세시위
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신한규는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瑞興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했다. 그러나 평양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연달아 기
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高等法院:1919. 6. 28)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250~2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