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임찬규는 1919년 3월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동군은 평양 한 가운데 있는 옛날 평양성(平壤城)의 성하군(城下郡)이었다.대동강유역의 옥야지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평안남도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교육의 발전이나 기독교의 전파 등이 평양의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있었다. 때문에 평양 시내에서 3.1운동 투쟁의 신호가 들리자 그 소식이 즉시 전군에 전파되고 주로 시장이 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대동군 각처에서 궐기하였다.
3월 2일 대보면(大寶面)에서는 숭실 학생 이응칠(李應七)이 평양에서 독립만세시위 사명을 띠고 와서 대평외리(大平外里) 취명학교(就明學校) 교원과 의논하여 학생들을 집합시킨 후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또한 평양 서교인 고평면장(古平面長) 조익준(趙翼俊)은 기독교인이었는데, 3월 3일에 시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날 아침에 군중을 모아 그곳 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소위 '합병기념비'를 우선 쓰러뜨리고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을 지휘하여 평양 시내로 행진해 들어왔다. 선교리(船橋里), 만경대(萬景臺), 평천리(平川里), 오야리(梧野里) 등 당시 대동군 지역에 속하였거나 평양 주변이던 지역 일대와 평양 동북방 40리 지점인 장수원(長水院)에서도 3월 3, 4, 5, 6일 등 여러 날에 걸쳐 시위운동이 연발하였다. 이들 각지에서는 최소한 6백명씩의 군중이 동원되고 있었다. 특히 3월 6일의 장수원 시위에서는 경찰과 충돌해 3~4백 명의 시위군중이 경찰관서를 파괴했다. 일제는 장교 이하 보병 20명을 평양에서 급파하여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시위 후 체포된 임찬규는 1919년 5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高等法院:1919. 5. 31)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377~38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