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주지하는 강연을 하고, 1944년 ‘일본의 학대’를 주제로 강연하였으며, 1942년부터 해방 이후까지 미국 사회에 대한민국의 실정을 알리는 강연을 수차례 개최함.
1929년~1943년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8권(2023년 발간)
1900년 8월 4일 평안남도(平安南道) 강동군(江東郡) 삼등면(三登面) 출신이다. 1920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1921년 5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뉴욕지방회에 가입했다. 1921년 아오와 대학 중학부에 다녔고, 1923년 시카고 하이드탁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카고대학에 재학했다.
1923년 5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9월로 서기로 임명되었다. 1924년 6월 북미대한유학생회의 잡지 『우라키(The Rocky)』 기사부를 담당하였다. 1925년 5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중부대회 총무가 되었고, 12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이사부원이 되었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자 1932년 2월 7일 뉴욕 한인들이 조직한 공동대회에 위원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5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동부대회 재정부원이 되었다. 1941년 12월 25일에 조직된 디트로이트지방회 임시회장에 선임되었고 1942년 1월 4일 디트로이트지방회 집행위원장 겸 선전위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디트로이트지방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교회와 학교에서 활발한 강연과 선전 활동을 펼쳤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워싱턴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 산하에 1944년 6월 4일 협찬부(協贊部)가 조직되었다. 황창하는 협찬부 예하 내사부 부장을 맡았다. 1944년 7월 4일 워싱턴에 있는 한인 기관 간의 합작회의가 개최되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 후보자로 선출되었다. 1929년부터 1943년까지 의무금‧의연금‧독립금 등을 여러 차례에 걸쳐 지원하였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민보(新韓民報)(1921. 5. 26, 1923. 9. 6, 1924. 7. 10, 9. 25, 1925. 12. 17, 1927. 5. 26, 10. 13, 1928. 8. 9, 8. 16, 1929. 1. 24, 2. 21, 4. 11, 1930. 2. 6, 6. 19, 1931. 4. 2, 10. 29, 1932. 2. 18, 5. 19, 1933. 3. 9, 7. 13, 1938. 3. 10, 1941. 2. 13, 1942. 1. 8, 1. 22, 1. 29, 2. 12, 3. 12, 3. 19, 3. 26, 4. 2, 5. 7, 6. 18, 8. 13, 1943. 1. 14, 3. 9, 3. 18, 3. 30, 5. 27, 6. 15, 7. 22, 1944. 6. 29, 11. 9, 1945. 2. 22, 10. 25)
- 국민보(國民報)(1944. 8. 2, 12. 6)
- 북미시보(1944. 10. 1)
-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이입수입 불온간행물 개황(1928. 3. 22)
- 요시찰인관계잡찬(要視察人關係雜纂)-본방인(本邦人)의 부(部)-조선인관계(朝鮮人關係)(조선총독부 경무국, 1931) 581호 15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제8집 632면
- 도산안창호전집(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2000) 제7권 374면
- 도산안창호전집(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2000) 제9권 361면
- 도산안창호전집(도산안창호선생전집편찬위원회, 2000) 제10권 7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