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고도흘은 함남 풍산군(豊山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천도교인인 고도흘은 3월초 맹시정(孟時楨) 등 풍산지역 교인들과 함께, 강희준(姜熙俊)으로부터 3월 1일부터 서울에서 손병희가 주도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3월 13일 하지경리(下地境里) 전도교실에서 풍산 시위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전해 들었다.
거사 예정일인 3월 14일, 맹시정은 하지경리의 불암(佛岩)에서 군중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는 노원리(老院里) 방면에서 오는 많은 행인들을 이끌고 풍산 천도교구당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교구장인 주병남(朱炳南)과 주의락(朱義洛) 등의 천도교 지도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모여든 군중이 1,000명을 넘었다. 신도들은 교당 안에 들어가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린 다음 김창선(金昌善) 등의 연설을 들었다. 연설이 끝나자 교당 내외의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높이 흔들었다. 급히 출동한 경찰은 교당 안에 들어와 이들
을 내쫓으려 하였으나, 오히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며 헌병분견소 앞까지 이르렀다. 헌병의 총격으로 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고도흘은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자기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기초한 의사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며, 그래서 제1심, 제2심에서 받은 유죄 판결은 부당하여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라며 상고하였으나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國史編纂委員會, 1991) 別集 1권 160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731~733면
-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23)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