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권태용은 1925년 2월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이토비행학교(伊藤飛行學校)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 체신성(遞信省) 항공국(航空局)의 비행사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26년 5월 조선청년 비행사 양성을 위해 서울 노량진(鷺梁津)에 조선비행연습소(朝鮮飛行練習所)를 설립하고 교관(敎官)으로 근무했다.
1927년 중국 우창(武昌)의 국립 중산대학(中山大學)에 들어갔다. 4월 국민당군의 중국혁명에 참가했다. 12월 9일 도쿄에서 창립된 조선비행구락부(朝鮮飛行俱樂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이른바 ‘M.L계’ 출신으로 중국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국내로 들어온 이평산(李平山)의 지도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재건운동과 혁명적 대중조직운동에 뛰어들었다. 국내에 활동의 기반이 없었던 관계로, 1930년 6월부터 1931년 4월까지 정원복(鄭元福)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신호집(辛皓集) 등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1월경부터 서울 서대문 밖 금화산(金華山) 등지에서 이평산·한상건(韓相健) 등과 만나 학생들의 조직화와 비밀결사 조직 그리고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문제를 논의했다.
1931년 6월경 이평산 등과 함께 비밀결사 경성학생RS협의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서울시내 각 학교의 사회과학 연구와 동맹휴교(同盟休校) 지도 등을 목적으로 비합법 독서회들의 지도기관 역할을 맡았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중앙고등보통학교 등 여러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직화하였다. 노동청년뿐만 아니라 학생층도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판단에서 학생층의 조직화에 노력했던 것이다. RS협의회는 일본제국주의 지배에 반대하여 각 학교의 동맹휴교를 지도했다. 또한 각 학교의 투쟁슬로건에 ‘만주출병(滿洲出兵) 반대’ 항목을 추가하여 반전운동(反戰運動)을 전개했다.
이즈음부터 학생관련 조직은 최태용에게 인계하고 이평산과 함께 노동자 및 농민의 조직화에 노력하기로 했다. 1931년 8월 박진홍(朴鎭洪)과 만나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는 문제, 고무공장 직공인 최길환(崔吉煥)과 만나 동지 규합 방안을 협의했다. 하지만 9월 2일 이른바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이평산과 함께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에 체포되고 말았다. 10월 6일 검찰로 송치되었다. 10월 15일 이평산과 함께 불기소(不起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후 박진홍 등을 만나 곧바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32년 1월까지 노동자 조직을 공고히 할 것을 계획했다. 인쇄직공 김필연(金弼鍊), 오사카마이니치신문(大阪每日新聞) 배달부 김홍식(金弘植)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었다. 2월 26일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오랫동안 미결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1933년 1월 25일 옥중에서 순국(殉國)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매일신보(每日申報)(1931. 10. 6, 1932. 2. 3, 2. 16, 2. 27)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1991) 별집1, 29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