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0권(2012년 발간)
박병훈은 함남 안변(安邊) 출신으로 1907년 9월 중순부터 강원도 고성군(高城郡)에서 남희필의진(南希必義陣)에 참여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동년 12월 20일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뒤, 해산 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 침략 세력과 그에 편승한 친일 주구배에 대한 공격을 통해 응징이 전개되었다. 강원도 원주진위대(原州鎭衛隊) 대대장서리(大隊長署理) 정위(正尉)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는 1907년 8월 5일 봉기한 이래 강원도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봉기 이래 김덕제는 1부대를 이끌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양양,간성,고성,통천 등지로 진출하였고, 민긍호는 제천,충주,장호원,여주,홍천 등지로 진출하였다. 강원도 동해안에 진출한 김덕제는 약 3천명의 의병진을 형성하고 각처를 전전하며 활동하고 있었다. 간성(杆城) 지역에서 1907년 11월경 의병에 가입한 사람은 조병묵(趙炳默),남희필(南喜必),정덕삼(鄭德三) 등 7인이었다.
박병훈은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단삼리(團三里)의 이년형(李年亨)의 고용인으로 있다가 남희필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다. 박병훈은 1907년 9월 중순 의병에 투신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던 중 동년 12월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水洞面) 원대리(院垈里) 박경서(朴京西)의 집에서 일본군 수비대에게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8(國史編纂委員會, 1981) 義兵篇ⅰ 314~3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