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25년 6월에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시대일보(時代日報)』 하동지국(河東支局) 기자로 근무하면서 하동청년회(河東靑年會)에서 활동했다. 1927년 4월 8일 설립된 하동사회과학연구회(河東社會科學硏究會)에서 출판부(出版部)에서 일했다. 8월 하동청년회를 하동청년동맹(河東靑年同盟)으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준비위원을 맡았다. 김용수(金龍守) 등이 운영하던 노동야학(勞動夜學)이 정지되자 이를 하동청년동맹에서 인수했다. 9월 10일 개학식을 열고 강사로 활동했다. 1928년 11월 10일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 윤영철(尹永轍) 등과 함께 하동경찰서(河東警察署) 경찰들에 붙잡혔다.
1931년 7월부터 비밀결사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소속 이상북(李相北)으로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 『봉화(烽火)』 등을 건네받고 그의 지도를 받았다. 8월경부터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산하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위해 부산(釜山) 등지를 오가며 활동하였다. 9월 적색노동조합경남동부위원회(赤色勞動組合慶南東部委員會) 결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1월 2일경 부산부(釜山府) 목도(牧島) 동삼동(東三洞)의 김유태(金有泰) 집에서 이상북·신만중(愼萬重) 등과 회동했다. 11월 7일 러시아혁명기념일을 기하여 ‘조선 독립’과 항일(抗日)을 내용으로 한 유인물을 제작·등사해 부산시내에 배포할 것을 계획하였다.
1932년 5월 1일 부산에서 발생한 ‘적색노동조합협의회 사건’에 연루되어 신만중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8월 12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오랜 취조와 고문 끝에 12월 27일에 예심(豫審)이 종결되었다. 1933년 3월 2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晉州支廳)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34년 3월 4일 부산형무소(釜山刑務所)에서 출옥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7. 8. 6, 9. 8, 1932. 12. 30, 1933. 3. 20)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33.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