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강화군 부내면 관청리의 3.1만세운동은 유봉진(劉鳳鎭)·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 등 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3월 8일 예수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유봉진·황도문 등이 모여서 동지를 규합하기로 하고 믿을만한 자에게 “다음날 9일 동리(洞里) 교회당에 모이라”는 내용을 통지한 결과 수십 명이 모여 읍내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거사준비에 들어갔다.
3월 11일에는 황유부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 등의 문건을 수백 매씩 인쇄하고 황도문은 18일의 거사를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강화인민에게」라는 전단과 「독립가」를 만들었다. 3월 18일 오후 2시 유희철(劉熙哲)이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장을 한 바퀴 돌고 군청으로 진출하자 만세시위대는 5,000~6,000명으로 늘어났다. 군청 앞에서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행진을 벌이던 시위군중은 오후 5시경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경찰들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하여 유희철·장상용(張相用)·조기신(趙基信)을 석방하였다. 시위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장에 모여 밤늦게까지 만세를 외치다 자진 해산하였다.
박영칠은 1919년 3월 8일 강화군 부내면 관청리 시장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피하던 중 이듬해 체포되었다. 1920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3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6일 출옥하였으나 1920년 9월 10일 오전 10시 자택에서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20. 5. 6)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34~36면